무쿠 @Kmg081800
미신
신룡환생당보
당가에 미숙아가 태어났다.
같은 모친 밑에서 태어난 당잔과 달리 아이는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작았다. 울음소리도 어찌나 작던지 아이를 받던 사람들은 아이가 세상 빛을 받자마자 죽은 줄 알았다. 작디 작은 아이를 본 어미는 아이가 자신의 악력에 부서질까 쓰다듬지 못했다. 숨을 죽이며 울고 있는 반려의 곁에 독왕 당군악이 왔다.
"상공...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지 못해 죄송하다 우는 반려에게 당군악은 고생했다고 다독인다. 어미 옆에서 새근새근 자는 아이는 당군악의 손바닥 하나로도 잡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 이 아이가 험한 강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비도를 잡을 수 있을까. 독공을 익힐 수 있을까. 걸을 수 있을까. 당군악은 그마저도 걱정이 되었다.
이 아이의 앞길이 걱정된 당군악은 당가 사상에서 가장 완벽하고도 강한 무인의 이름을 붙였다.
"당보(當步)."
아이의 이름을 들은 시비는 무례도 잊은 채 자신들의 주인을 보고 이내 눈물을 훔쳤다. 가주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지었는지 알아차렸기에.
자식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당군악은 그 어떤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다 내어 줄 것이다.
***
막내는 천재다.
남들보다 작은 손으로 힘겹게 비도를 던질 땐 조마조마 했으나 며칠 후에는 능숙하게 비도를 다루었다.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였는데 몰래 독을 먹었다. 그때마다 혼을 냈는데도 질리지 않고 당보는 독을 취했다. 작은 몸에 큰 것이 들어가니 열병이 나 사경을 헤맸다. 한때 강해지고 싶은 막내의 마음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것도 잠시 또박또박 말할 수 있게 된 막내는 중원에 대해 물었고 모든 것을 들은 막내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사람마냥 울었다. 몇날 며칠을 먹지고 자지도 않고 울며 날뛰었다.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울다 숨이 넘어갈까봐 당군악은 일도 내팽겨치고 막내의 처소 앞을 서성거렸다.
"아보."
문 너머에서 당군악이 당보를 걱정스레 부른다.
"......."
돌아오는 답 대신 문이 열렸다. 쫓겨날까봐 허겁지겁 들어간 당군악은 눈앞의 광경에 미간을 찌푸린다.
"다쳤느냐."
바닥에 앉아있는 당보의 거친 숨을 들은 당군악이 그를 침상에 앉혔다. 텅빈 눈을 한 당보에게는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당군악이 깨진 컵 파편에 찢어진 당보의 손바닥을 치료하려 팔을 잡는다. 작은 검은 손에 큰 파편이 박혀있다. 마취를 하려 침을 꺼내려할 찰나 당보가 빈 손으로 박힌 유리 파편을 빼냈다.
"당보!"
꽉 쥔 유리 파편을 빼앗아 제지하다 얌전해졌다. 치료하는 중에도 당보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왜그러느냐."
물어도 당보는 답하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느냐."
".........화산. 화산에 대해 알려주십쇼."
하여 당군악은 중원이 아닌 화산에 대해 알려주었다. 암존께서 화산의 매화검존과 막역지우라 그런지 그 이름을 이은 내 아들 또한 화산을 신경쓰는 것이겠지.
조용히 모든 것을 들은 당보는 눈물을 흘리곤 나에게 물었다. 나를 보는 게 맞는 걸까.
"제가 어찌 하였으면 좋겠습니까."
"다, 당...."
"제가 어찌 하여야 합니까."
내 팔에 매달린 당보의 손에서 피가 새어 나온다. 가까이 온 당보가 열이 난 것을 알아챈 당군악은 당보를 껴안고 말했다.
"살아라."
내 말을 들었는지 모른다. 열병에 취해 잠이 든 자식이 부디 살길 바라며 당군악은 당보의 다친 손바닥을 치료했다.
"소가주."
"예."
"화산에서 값비싼 매화 나무를 구해오거라."
매화를 본 아이가 다시 환히 웃어주길 바라며 당군악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산과 교류를 하였다.
***
건강을 회복한 당보는 처소앞에 심어진 매화 나무를 보곤 살포시 웃었다. 흩날리는 꽃잎과 그 밑에 있는 당보를 보니 고단한 마음도 눈 녹듯 풀리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어른스러운 막내가 투정을 부린 것이라 생각하자.
당군악은 고개를 숙여 당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줍게 입을 오므려 아비의 손길을 받는 막내는 너무나 작아 귀엽기만 하다.
이 평화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처소나 당가에 틀어박혀 시장에 나오지 않던 당보가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가출로 생각한 당군악이 무인들을 풀어 찾으려 할 때 당보가 돌아왔다. 아무리 귀하디 귀한 막내라지만 이번에는 당군악도 참을 수 없었다.
"...........!!"
크게 혼을 내려 한 당군악은 당보의 묶인 머리카락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다들 이 늦은 시간에 어인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언제나 들어도 어른스러운 말투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핀 당보에게 당잔이 물었다.
"그러는 넌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디를 간게야."
아차 싶은 당보가 오랜만에 보이는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장포에서 한 서적을 꺼내 답한다.
"산보를 다녀왔는데 흥미로운 서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걸 읽다 보니 시간이 이리 늦은지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늦는 일을 없을 겁니다."
달빛이 내리쬐여 밝게 빛나는 당보가 쥔 서책의 제목은 찢어져서 본래의 명은 모를 [呪]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하루하루 폐인처럼 살아가던 당보가 볼을 붉게 물들며 웃었다. 책을 더 읽고 싶으니 들어가보겠다 한 당보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너희는 보았느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당군악이 말한다.
"당보의 머리를 보았느냐."
당군악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토록 강인한 아버지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다. 희열이 아닌 두려움이라는 것 쯤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당보의 머리모양을 떠올렸다. 비싼 향유를 써 윤기가 있긴 하였으나 항상 묶지 않고 풀어헤쳤었다. 그 머리카락을 예쁘게 묶고 싶어하는 사람은 당보의 어미와 그의 누님인 당소소를 포함한 여럿 있다. 하나로 예쁘게 땋아져 있는 머리. 처음에는 무엇이 문제인가 싶었는데 요즈음 시전에 떠도는 소문이 스쳐지나갔다. 당잔은 소름이 쫙 돋아 아버지를 쳐다본다.
우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버지는 가주전에 틀어박혀 서책을 뒤졌다. 하루 이틀 꼬박 새며 아버지와 우리는 [防]가 적힌 오래된 서책을 찾았다.
당보가 원하는 것은 다 해줄 것이다.
당보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고 줄 것이다.
허나 이번만은 당보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
설령 당보에게 미움받는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결코 들어줄 수 없다.
당보야. 아보. 아비가 부탁한다. 아비보다 먼저 가지마라. 아비는 널 보낼 수 없어.
장수(長寿)가 아닌 단명(短命)을 원치 말아다오.
늦은 밤 홀로 남겨진 당군악이 홀로 외로이 술을 마시며 흐느낀다.
***
같은 시간 당보가 하나의 초에 불을 밝혀 두개의 슬잔에 술을 따른다.
"형님이 없는 이곳에 제가 왜 있습니까."
붉은 매화꽃이 지고 푸르른 잎파리가 무성히 나있는 나무에서 딴 매실이 탁자에 놓여있다. 소매에서 작은 조각칼을 꺼내 매실 씨앗을 빼내고 빈 공병에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한층에는 매실. 한층에는 설탕. 조용한 방안에 서걱서걱 칼질하는 소리가 한참 들리다 조르르 물소리가방안을 채웠다.
"혼자 마시는 술 참 맛없소."
당보는 비워지지 않는 술잔을 들어 공병안에 부어 뚜껑을 닫았다.
당신의 빈자리에 내가 닿아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안합니다."
나약한 이 마음에 다시 쥐어진 것은 후회였다.
가슴에 사무치는 외로움과 그리움에 당보는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
"오늘도 당보는 늘 같더냐."
근심가득한 목소리로 아비가 묻는다. 오늘은 다를까. 하루 하루 희망을 가지며.
"예. 오늘도 나무 아래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당잔이 제가 죄송한 듯 침울한 얼굴로 답한다. 당군악은 서신을 덮고 마른 눈을 매만진다. 책만 읽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그 책이 불길하기 그지 없는 책이라 문제지만. 당군악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당보의 처소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불안한 마음에 아이들과 찾은 책에서 나온 명을 늘리는 법을 막내 몰래 하고 있다. 서책에서 음덕(陰德)이 운명을 바꾸는 작용을 하여 단명에서 장수로 바꿀 수 있다 했다.
음덕은 보이지 않는 덕이다. 알게 모르게, 티 나지 않은 시간과 공간 속에 행해지는 모든 이타적인 행위.이런 음덕은 많이 쌓았더라도 나에게 찾아올 때는 돌고 돌아서 뒤늦게 온다. 말년이나 최악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이나 환란이 발생했을 때 누가 음덕을 많이 지은 자인지 확연히 구분된다. 때로는 생전에 덕을 전혀 못 보고 자식들이나 후손들에게만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암존 당보께서 마교로부터 사천과 중원을 구제하셨다. 생전에 그 덕을 다 못누리고 전쟁 중 돌아가셨으니 그 이름을 이은 내 아이가 음덕을 누릴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명당. 즉 자리가 중요하다. 하필 당보의 처소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 아무 변명이나 하여 처소를 옮겨주겠다 번번히 말해보지만 당보가 듣질 않는다.
이 처소에서 보는 달이 어여쁘다 조르는데 누가 말리랴.
우리는 당보 모르게 처소에서 떨어진 건물에 부적을 붙이고 나무를 소나무와 편백나무로 바꾸고 그 아래 복숭아 향낭을 두었다.
당보의 머리를 무엇보다 바꾸고 싶었으나 순진한 얼굴로 이게 왜요? 라 말하는 아이에게 차마 단명하는 머리니 그만하라 말하지 못했다.
단명을 원하는 아이에게 그것이 단명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니 그만하라 하면 싫다고 안하겠는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하여 꿋꿋히 할 것이 분명하다.
그 망할 머리 모양 때문인지 가뜩이나 미인인 아들이 본의아니게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어느 망할 놈팡이에게 잡아먹히진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누군가를 연모하게 되면 그쪽에 집중하지 않을까 싶지만 당군악은 제가 인정하지 않은 놈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주고 싶지 않다.
한숨과 함께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간다.
"하아...."
암존이시여. 부디 제 아들을 지켜주십시오.
오늘도 당군악은 암존 당보에게 빈다.
당보 또한 아무도 모르게 행동한다. 당보가 모든 것을 알고 처소에서 날뛰다 부숴버린 컵 파편에 의해 새겨진 작은 상흔을 손톱으로 긁는다.
"딱 좋은데에 그어졌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작은 제 손바닥에 올라온 피가 붉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면 좋겠다. 눈을 뜨면 익숙한 식졸들이 당가터에서 생활하고 있고 머저리같은 원로원도, 동생들이 있으면 했다. 꿈이 아니라는 것 쯤은 얄상한 내 몸과 허약한 무공이 알려준다. 과거를 알고 싶어 기본 무공을 익혔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당보는 주먹을 꽉 쥐어 피가 난 상처를 벌린다.
"......!"
통증이 살짝 느껴진다. 이 통증이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을 자각시켜 싫증이 났다. 기특한 당군악을 위해, 내가 가면 홀로 남겨질 조평이를 위해 상처 부위에 금창약을 대충 바르고 당보는 나무 아래 앉았다.
희미해진 밤 속에 계속 있다 보면 언젠가 닿을까 싶어 당보는 그자리에 있는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꿈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습니다.
도사 형님.
약관도 안된 어린 소년이 처연한 분위기를 뽐내면서 나무 아래, 고독히 앉아있다.
이와 동시에 폐관수련을 했던 화산신룡이 강호로 나와 약선의 자소단을 가지고 사천에 도착했다.
***
"오늘따라 당가가 많이 소란스럽네."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술을 마신다. 나무 옆에 앉을 수 있는 의자도 탁자도 있건만 당보는 구태여 나무 밑에 앉아 술을 기울인다.
고귀하고도 찬란한 매화가 지고 생명력 넘치는 녹음이 가득한 매화 나무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며 좌쪽으로 내린 머리를 우쪽으로 바꾸었다.
늘 그렇듯 눈을 감고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들린 것은 지금의 아비 당가주의 고함이었다.
'살려라!!'
누가 당가주의 마음에 쏙 든 사람을 건들였나보다. 후에 소가주를 끌고가라는 말에 궁금해진 당보는 기감을 더욱 펼쳤다.
'화산신룡...'
희미하게 들린 별호는 화산이었다. 이번에는 아패가 잘못했구만. 지금의 화산을 볼 면목이 없어 당보는 화산의 객청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쏴아-.
뜨거운 여름 바람과 향기로운 매화나무가 만난 소리가 들린다. 가라고 재촉하는 듯 하나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약하지만 스스로를 저주한 놈이다. 어린 화산에게 어떤 해를 끼칠 줄 알고 만나겠나.
"....쿨럭!........미안합니다."
짧게 나온 기침에서는 약간의 피가 나와 당보의 입안을 촉촉하게 적셨다. 화산신룡이라는 자가 묵고 있는 곳을 향해 당보는 땅에 이마가 닿도록 절을 하였다.
***
화산신룡이 깨어날 동안 모두가 숨을 죽이며 긴장했다. 안그래도 미안한데 저주까지 끼얹으면 곤란하니 그날은 가만히 있었다. 내 기도가 효험이 있었나? 전에는 그렇게 빌어도 들어주질 않더니 도사 형님이 들어줬나보다. 제 정인은 역시 화산을 좋아한다. 하나뿐인 정인이 제발 와달라, 목소리 좀 들려달라 사정사정을 해도 안들어주더니 화산 제자 살려달라니까 바로 들어줬다. 다음날, 화산신룡이 깨어났으니 틀림없다.
"형님 답소."
당보가 화산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웃는다. 화산의 제자들이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해서 아주 확실하게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게 미소지으며 당보는 머리를 빗는다.
나머지는 당군악이 알아서 잘 할테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은 당보는 서책과 곁들일 차를 꺼내었다.
그때였다.
우당탕탕 큰 소리와 소소의 어디갔냐는 외침과 따라오지 말라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곳에서 집중도 안될 것이 분명하여 당보는 다시 처소로 들어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중에 집안 사람이 오겠네."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당보는 조용히 하루를 보낸다. 음. 이렇게 빨리 올줄은 몰랐는데 석반을 들어야 할 시각, 당가주가 내 식사를 가지고 직접 찾아왔다.
"어디 아픈게야."
안그래도 신경쓸 것이 많은데 나까지 수고를 끼쳐버렸다.
"아닙니다. 손님이 오신것 같아 자리를 피해준 겁니다."
그러자 무섭기로 소문난 당군악의 얼굴이 구겨졌다. 힐끔 그를 흘기자 당군악은 아차 싶어 표정을 고쳐 자상하게 말한다.
"네가 그들을 왜 피하느냐. 너도 당가의 일원이니 그들을 만나러 가도 된다."
네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식의 자존감을 키워주려하는 것이 영락없는 아비의 모습이다. 참 기특하구나. 기특해. 나도 내가 부족해서 그들을 만나지 않은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을 보고 도사 형님을 덧붙여 볼까봐 그런거지. 싱긋이 웃어 당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때가 되면 만나러 가겠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날 생각이 없다. 그리 고하니 당군악은 풀어헤친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를 떴다.
익숙치 않은 온기는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
같은 날 밤 당보는 술잔 2개와 직접 당군 술을 챙기고 나무 밑에서 하늘을 본다. 별들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이 또한 풍류이니 당보는 술을 기울였다.
처음 술을 마셨을 때 어린 놈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었지. 나름 처연한 얼굴로 '답답해서요.'라 말하자 입을 꾹 다문 아이들이 귀여워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난 그러면 안되는데.
이리 행복해 하면 안되는데.
"크으..."
독한 술이 목을 타 속을 뜨겁게 한다. 역시 혼자 마시는 술은 맛이 없다. 비워지지 않은 술을 허공에 뿌려 당보는 하하 웃는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취기가 금방 올라와서이다.
"빨리 오시구려!!"
흩뿌린 매실술이 중력으로 인해 땅으로 떨어진다. 물방울만 떨어져야 하는데 하늘에서 쿵하고 떨어진다.
'누구지...'
녹색 머리끈을 쓴 채 나타난 이는 매화가 박힌 도복을 입고 있다. 형님과 닮았다. 당보는 그제야 자신이 술에 취해 꿈을 꾸고 있다 생각했다.
원하던 꿈이다.
매번 나타나지도 않더니 이제야 왔다.
"왜 이제야 오셨소이까."
황홀하다. 난 지금 어떻게 웃고 있지. 잘 웃고 있는 걸까.
"이 당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아십니까. 이리 오실 줄 알았으면 머리를 예쁘게 땋을 걸 그랬소."
달빛에 가려져 도사 형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 좀 작아지신 것 같고...
당보는 비틀 비틀 제 마음의 주인에게로 걸어갔다. 폭싹 안긴 그의 품이 따뜻하다. 역시 꿈이다. 형님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뭐 어떤가. 조금이라도 이 편안함을 느끼고 싶다.
"악!"
안도의 눈물을 흘리려 하자 머리카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억센 손길. 도사 형님이다. 헌데 꿈인데 이리 생생하게 통증이 느껴진다.
"야 이 망할 놈아. 이꼴로 누굴 기다렸어."
숫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말투가 도사라기엔 너무 사납다. 한층 가해지는 힘에 당보는 이것이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도사 형님...?"
목소리가 떨린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려 고개를 들자 눈앞에 있던 건 예전보단 앳된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 말투에 손버릇은 자신의 상공이다.
"그래 나다. 대답 안해?"
오랜만의 재회인데 형님 말을 도통이해 하질 못하겠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사 형님은 내 턱을 욱여 잡더니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나 없다고 그새 다른 놈을 꼬시려 했냐."
그의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빛난다.
"보고 싶었소."
".......말 돌리지 말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에게 안겼다. 형님이다. 도사 형님이다. 서툴게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익숙하다.
"왜 오셨습니까. 이리 험한 생에 왜 다시 오셨소."
"...........보야."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지도 못한 놈이 뭐가 이쁘다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래서 싫어?"
나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돌려 부정하며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무 좋소. 이럴 줄 알았으면 화산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볼 것을 그랬습니다."
서로의 온기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밤을 보냈다. 먼 훗날 그랬던 것처럼 달빛아래, 나무 밑동에 앉아 서로에게 술을 따르고 마시며 황홀하게 밤을 지새웠다.
***
나는 당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길 원했다. 저잣거리의 미신일 뿐이지만 단명을 부르는 머리모양도 그만 두었다.
근데 왜 하필 진홍빛의 비녀인가. 왜 화산신룡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건가. 아니 애시당초 둘이 같이 조반을 들러 손을 잡고 온 것이 문제지 않나. 익숙하게 그를 챙기고 챙김을 받는 광경에 밥과 물이 목구멍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참. 다들 보고 있는데."
수줍게 볼을 붉히며 내 아들이 웃고 있다. 매화나무를 구해다주고 보여준 미소보다 몇 백배나 어여쁘다.
밝아진 아들이 단수인 것은 아무래도 좋다. 살아갈 의지를 얻은 당보가 아름다운 세상에 있어준다는 것이 기쁘다.
"뭐 어때. 오랜만에 본 건데."
대체 언제 내 아들을 만났단 말이냐. 작고 소중한 내 아들. 여리고 아름다운 내 아들. 어릴 때부터 제 형들보다 뛰어난 비도술과 의술을 구사했던 귀재가...울화통이 터지는 와중에도 청명은 당보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당보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이럴줄 알았으면 소가주를 혼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니, 그렇다면 내 아들은 계속 그 처소안에 틀어박혀 망할 단명머리를 하고 있었겠지.
당군악을 포함한 당가가 낯선 당보를 보며 청명에게 질투심을 표출한다.
화산은 처음 보는 청명에게 낯설면서도 살기등등한 당가에게 되려 미안해져 눈치를 보았다. 이 살기가 느껴지지도 않는지 청명은 제 정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눈을 파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던가 말던가 청명은 어제를 회상한다.
당보를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빨리 오라는 불음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그의 앞에 섰다.
한걸음에 달려가 제 정인을 아껴주려 했건만, 당보는 술에 취해 볼을 붉그스름하게 상기된 상태로 어여쁘게 웃고 있는 것도 모자라 유혹이라도 하는 듯 흐트러진 무복 안에 하얀 살갗이 보였다.
청명은 그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당장이라도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제것이라고 표식을 새기고 싶었다. 심호흡 두어번을 해도 심장이 쿵쾅댄다. 오랜만의 재회다. 심지어 한쪽은 눈 앞에서 죽었다. 그 죽었던 정인이 다시 살아났는데 어찌 진정할 수 있겠는가. 이 격정된 마음을 여린 당보가 버틸 수나 있을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입술을 꾹 깨물어 눈물을 참았다.
진정하자.
후....
하.....
어찌저찌 진정된 마음은 당보의 발언으로 쉽사리 부서졌다. 제 인생에서 상공은 나밖에 없다는 놈이 이꼴로 몇 명이나 꼬셨을까. 주먹을 꽉 쥐며 청명은 입을 기묘하게 뒤틀렸다. 누가 보면 흡사 웃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청명의 속은 진창 뒤집혀졌다. 심장이 저릿, 아프다. 웃기지마. 누구마음대로 내 것을 탐내. 나만 좋다고 예쁘게 울며 안긴건 당보다. 청명이 이를 까드득 갈았다.
당보의 고운 머리에 청명이 손을 뻗는다. 오랜만에 만난 정인들의 재회는 보통 상냥한 접문이다. 하여 나도 그려러 했다. 네가 자초한 것이다. 당보야.
'악!'
꾀꼬리 같이 지저귀는 목소리구나. 곱네. 이 고운 목소리는 나만 들어야지. 당군악이 행한 것도 있어 약해진 저주는 머리끄댕이 잡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정도면 살짝 피를 토했다. 얘는 꼭 내가 없는 곳에서 아파한다. 자소단을 얘한테 줘야겠다.
긴 시간 대화를 나누자 오해는 풀렸으나 그 꼴을 여러 보았을거라 생각하니 속이 쓰다. 이와 반대로 입안에는 당보가 담근 술이 맴돌아 달기만 하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정도로 아주 달다.
당보가 아무도 곁을 내주지 않아 다행이다. 예나 지금이나 당보는 너무나 작고 어여뻐서 문제다.
***
이날 아침 청명은 당보를 데리고 다같이 조반을 먹었다. 당보와 숙취에 골골대며 밥을 먹고 옆구리에 끼고 다니자 당군악과 소가주, 작은 당 등의 얼굴이 놀라움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후식을 먹으며 담화를 나누던 중 곁에서 꺄르륵 웃는 당보가 매우 걱정되었다. 역시 데려가야겠다고 다짐한 청명이 당군악을 바라보자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에 살기까지 더해지니 천하의 매화검존도 소름이 돋았다.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 내 눈치는 기가막히게 잘보는 당보가 해맑게 말했다. 비록 그 눈치가 이번만은 발동하지 않기를 바랬지만말이다.
"아버지 저도 화산에 가겠습니다."
잠깐의 침묵 후 난장판이 벌어졌다.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라는 호칭에 놀랄 새도 없었다.
청명은 짧게 한숨을 쉬고 그 잠깐의 침묵 속 재빨리 당보를 안아 당가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었다.
"저, 저 망할 용새끼가 천독단과 미인루까지 가져가는 것도 모자라 소소까지 데려갔으면서 내 아들까지..."
독을 먹었을 때도 뿜지 않던 흰 거품이 당군악에게서 나왔다. 대노하는 아비를 두고 당보는 청명의 귀에 속삭인다.
"그렇게 먹기 싫다더니 이제야 먹으려고요?"
"마누라 말 잘들어서 손해보는 건 없다잖냐."
절정고수인 당군악의 귀에는 확실하게 들렸다. 누구마음대로 마누라냐. 왜 내 자식이 네놈 마누라야!!!!
"안돼. 안돼!!! 내 아들은 못준다!!! 아직 못줘!!!!!"
당군악의 발악에 청명이 대꾸한다.
"아직이라는 건 어찌됐든 준다는 거네요? 그럼 지금 주세요."
이틈을 타 청명은 제껏을 챙겼다. 뻔뻔한 놈같으니...속으로 말했는데 청명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조걸에게 던졌다.
"형님. 시장에 좋은 객잔이 있소. 그리로 갑시다. 야수궁은 내일 출발합시다. 네?"
정말 끼리끼리 만났구나. 그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던 백천은 거듭 폭탄발언을 하는 당보를 보며 납득했다.
"그럴까?"
청명아. 한시가 급하다며...윤종이 어색한 제 사제를 보며 식은땀을 흘린다.
"예. 오랜만에 만났는데 사천에 조금만 더 있다 가시죠."
그리고는 청명의 품에서 나온 당보는 굳은살이 박힌 청명의 손을 맞잡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사이를 가르려 추혼비를 든 당군악은 더할나위없이 만개한 꽃처럼 웃는 아들 보고 덩달아 웃어버렸다.
"하하하하."
"아버지..?"
연달아 온 충격에 정신이 나가신건가. 당패는 쓰러질 것 같은 아버지의 뒤에 슬그머니 섰다.
당군악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허탈하게 생각한다. 그래. 내 아들이 행복하다면 됐다.
그것 말고 무엇이 또 필요하단 말인가.
"이제 그 머리는 하지마라."
"왜요? 이거 나름 편한던데."
"하지말라면 하지마!"
미신이지만 혹 모르지 않은가. 그것이 진정 사람을 단명시킬지.
"난 너와 이번에야 말로 백년해로 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