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농장 -
비누향기
청명당보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온갖 향과 색들이 형형히 자신을 뽐내며 ‘저를 좀 봐달라’ 아우성치는 틈바구니에서, 그는 언제나 맑은 비누 향을 간직하고 있었다. 머스크, 시트러스, 플로럴, 우디... 코를 찌르는 독한 향수들 사이에서, 그는 아무 기교도 없는 포근한 비누 향이 났다.
“형님은 향수 어떤 거 쓰세요? 머스크? 좀 달달한것도 같은데 플로럴인가?”
“나 향수 같은 거 안 써.”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깟 향수 브랜드 하나 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쪼잔하게. 왜,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자기 마음에 쏙 드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꽁꽁 숨겨두고 자신이 독점하려 드는 사람. 그러나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츰 깨닫게 된 사실은,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슷한 향을 찾으려 수백 개의 향수를 시향하고, 수십 개의 향수를 사 모으고, 온갖 향기 나는 것들로 집안이 가득 찰 무렵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향은 절대 향수 따위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
그와 함께 있으면 내 몸에서 나는 향이 거슬렸다. 기껏 신경 써 왁스로 올린 머리며, 머리가 띵할 때까지 시향하며 고른 비싼 향수, 잘나간다는 말에 혹해서 산 어느 어느 백화점의 바디워시까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로 덕지덕지 칠해놓은 내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마치 너는 그 사람의 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 시간은 공들인 머리를 다시 벅벅 감았다. 거울 속에 푹 젖은 머리를 한 남자는 참 불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뚜루루루-]
“형님, 저희 한 시간만 늦게 볼까요?”
“갑자기? 왜?”
“...제가 방금 일어나서요. 어제 늦게 잤더니 늦잠을 자버려서.”
구차한 변명.
말도 안 되는 핑계.
“그래 그럼, 내가 데리러 갈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을 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형님.”
한 시간 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손을 대면 댈수록 점점 엉망으로 뻗쳐가는 머리카락이 원망스러웠다. 제발, 왜 하필 오늘 이러냐. 우왕좌왕 하는 사이 한 시간이 지나갔다.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 기다리게 했다가 진짜 밉보일라, 무슨 옷은 입는 건지도 모르고 잡히는 대로 팔을 꿰었다. 손에 잡히는 스프레이를 대충 칙칙 뿌리고는 정신없이 현관 밖으로 내달렸다.
“오늘은 머리 안 했네.”
“네? 아...”
우왕좌왕하다 뛰쳐나온 머리는 방금 감은 것처럼 아무런 세팅이 되어있지 않았다. 풀어진 모습을 보여 실망하려나, 아무리 그래도 뭐라도 하고 나왔어야 했나. 옆자리를 힐끔거리며 반응을 살피고 있자, 왜 그리 안절부절해? 하는 물음이 들려왔다. 안절부절 할 수 밖에.
그야 나는-
“그게 낫다. 귀엽네.”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으니까.
*
그는 비누 같은 사람이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는 늘 혼자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를 드러내려 안달을 내지도, 그렇다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매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비누처럼 포근하게 그 모든 것을 받아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맑은 웃음에 내 마음을 전부 내어줘 버린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형님이 나쁜 거예요.”
푸핫, 하고 웃는 당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참나, 너는 별걸 다 나쁘다고 한다.’
그 생각에 배시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정말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보고 웃고, 말을 걸면서. 이따금 당신을 탓하기도 했으나 결국 화살의 끝이 향하는 곳은 나 자신이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이었을 뿐이니까. 내가 당신에게 온 몸을 던져 넣은 거야. 그래, 그뿐이었다.
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위치는 평생 이곳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덜컥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형님, 왜 밖에 나와 있어요. 안에 들어가 있지.”
“엉, 너 빨리 나오라고 시위하는 거야.”
이렇게 귀여운 시위가 또 어디 있을까. 저도 모르게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부여잡았다.
“시위도 시위지만... 감기 든다니까요.”
“걱정되면 빨리 나오겠지. 가자, 빨리. 나 추워.”
그럴수록 나는 그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으려 했다. 부디 당신이 날 내치지 않기를. 나를 돌아봐 주기를, 나와 발맞추어 걸어주기를.
“같이 가요, 형님!”
그리고 언젠가, 내가 당신의 옆에 설 수 있기를.
*
“...비누 향이 나요.”
다분히 충동적인 말이었다. 평소였다면 말하지 않았을, 속으로 삼켰을 말. 날이 좋아서 그랬나,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나서, 오늘 버스가 빨리 와서, 커피가 맛있어서...
아니다.
언젠가는 전하고 싶었던 말이었던 거지. 그리고 그게 오늘이 되었을 뿐이다.
비웃으려나, 욕을 하려나, 혹시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그런 게 아닌데. 표정이 어떻지? 보이지 않는다. 변명해야 하나, 농담인 척 웃어넘겨야 하나, 제대로 된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시야가 울렁울렁 흩어졌다.
“참나, ...넌 참 이상한 애다.”
심장이 덜그럭거리며 내려앉는 듯했다. 저건 또 무슨 뜻일까. 내가 싫어졌나? 앞으로 만나주지 않으면 어쩌나. 난 이제 당신이 없으면 안 되는데. “...이건 뭐 분위기도 없고 멘트도 꽝이고. 다시 해봐.”
“예...? 뭐를...”
“고백.”
무슨 말이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너무 바라고 고대하던 말이라서. 이젠 꿈에서도 당신이 아른거릴 지경이라서, 내가 만들어낸 환청인건가. 머리가 사고하기를 멈춘 것만 같았다. 어서, 하고 그가 채근하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입술이 달싹거렸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수백 번을 생각하고, 수십 번을 연습했던 그 말이 떠듬떠듬 흘러나왔다.
“...좋아해요.”
내가, 형님을.
“...정말 많이.”
천천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순간 시야가 흔들린다.
“참 오래도 걸린다. 그치?”
나를 품에 안은 그의 몸에서 익숙한 비누 향이 났다.
다정하고,
포근하고,
따뜻한.
아,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구나.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이제는 나에게서도 비누 냄새가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