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제목
구구당 @gugudangdang
청명당보(신룡암존? 검협암존 등)
상열지사재계
(相悅之詞齋戒)
검협암존
* 검협 청명X생존 당보. 둘이 재회한 직후, 그 다음날 아침을 보고 싶어 쓴 글입니다. 당보가 청명을 따라 잠시 화산으로 가 요양을 하기로 했다는 설정… …
* 당보는 백년 간을 잠들어 있다 청명이 천우맹 총사직으로 추대된 이후에 깨어났다는 설정이며, 추후 하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저녁에 드리운 주렴珠簾이 새벽녘 푸르게 색이 빠져 오색 구름이 되었다. 당 왕발王勃의 등왕각시를 뒤집을 만큼 밝고도 수런한 아침이 온다. 청명과 당보, 검존과 암존, 돌고 돌아 강호의 으뜸가는 신예와 제일가는 노괴의 위치로 둘은 피울음 맺힌 세월을 넘어 재회했나니, 그들이 서로를 알아본 이후 밤이슬이 나리자 청명이 장장 백여 년의 공백으로 하여금 닳아빠진 당보의 심신을 걱정하여 서둘러 자리에 눕힌 것이 지난 밤의 일이다. 그들은 한데 엉겨 잠을 자고 있었다. 먼저 정신이 든 쪽은 청명 쪽이다. 스르르 눈을 뜨자 어디 안 가고 곁에 뻗은 당보가 보인다. 물이 빠진 뒤, 성가신 잔여물처럼 남은 잠기운을 마저 몰아내려 얼굴을 소세하듯 벅벅 문지르다 새삼스럽게도 또 돌아본다. 유독 많이 떠올린 날엔 꼭 몽중에 나오더니만. 아예 옆구리에 끼고 잤다고 꿈자리는 편히 둬 준 건가. 곧게 누인 몸 위로 이불이나 마저 덮어 두고는 창을 연다. 눅눅한 공기는 가시고, 어느새 구름도 환히 개어 하늘이 청량하다. 불 꺼진 향롱이 은은하게 바람에 섞인다.
“당보. 일어나라.”
“.....”
당보, 볕이 닿자 조용히 감긴 눈두덩이 곧즉 파르르 떨렸다. 첩모를 촘촘히 올리머 기어이 미적미적 열린 눈꺼풀에 혼곤함이 무겁게 내깔려 있다. 부스스 일어나 멍뎅하니 천장을 노려보면 늘 똑같은 격자가 새겨져 있고.... 이제는 갯수를 헤아리기도 귀찮아 동공만 떼룩 굴리면 막 일어난 듯 보이는 보송한 화안이 있다. 그 광경이 꼭 입때 꾸던 꿈결 같아 잠시간 대답이 없다. 청명, 그답잖게 바지런히 창 열어 밤새 묵은 공기를 환기하고, 벗어둔 무복을 주워 입다가 줄곧 말이 없자 돌아본다. 몽중인지 생시인지 가늠을 못 하는 얼굴. 면경 속에서 많이도 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가간다. 이마를 가볍게 통 퉁기며 씩 웃어보인다.
“이게 형님 일어나셨느냐 말도 않고. 움직여라. 금일 할 것 많다.”
그간 겪은 긴 잠의 여파인지 이울듯이 꾸벅꾸벅 고개를 떨어트리는 게 여간 비몽사몽해 보였다. 이마를 타고 듬성듬성 흘러내리는 잔머리가 볕을 받아 옅은 황색으로 빛났다. 왜 잠에서 깼는데 저 도사가 여즉 눈앞에서 아른거릴까, 싶던 의아스러움은 지척에 다가와 이마를 통 튕기는 손가락에 차츰 말갛게 흩어진다. 당보는 입꼬리를 쭉 추어올리고 비죽거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갔는데, 요걸 이렇게 깨닫게 해 주시네.”
몸 위로 덮인 요를 걷으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허리 아래로 후루룩 떨어졌다. 자기 전에 빼놓은 비녀를 더듬더듬 찾아 손에 쥔다.
“예, 예. 일어나셨습니까. 불초 아우도 막 정신을 차린 참입니다. 금일 할 일이 많다는 소리는 짐부터 싸란 말씀이신가?”
“허, 잘 테냐 마실 테냐 물으면 무조건 마시던 놈이 무어 이리 잠만 늘어나서는.”
망나니보다 더한 성정과는 딴판으로 신속하고 깔끔하게 의장을 갖춰 입은 청명은 그새 어디서 찾았는지, 작은 단도와 넓은 종잇장을 쥐어 들었다.
“이거, 상한 부분 다 쳐내려거든 아예 모가지를 쳐야 하게 생겼네. 짐도 싸고 가주에게 언질도 해야겠고 일이야 많은데, 우선 네 몰골부터 좀 다듬어야 쓰겠다. 어딜 개방 거지 꼴로 화산 문을 넘으려고 들어? 들긴.”
어느 새 뒤를 점한 청명이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억센 손으로 슬슬 쓸어다가 한데 모아 당기고는 혀를 끌끌 찼다.
“이 형님이 당가의 태태상장로를 더러 개방 거지꼴 이러시네. 이래봬도 제가 천하에 날 적부터 세가집 도련님 출신인 몸인뎁쇼.”
유선지 바스락대는 소리가 난다.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으나 작은 칼을 들고 등 뒤에 앉은 이의 그늘이 장막처럼 엷게 내렸다. 징처럼 굳은살이 잔뜩 박힌 검수의 억센 손이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칼을 한 움큼 쥐어 흔드는 손속이 다정하진 않았으나, 머리를 다듬어 주려는 의도를 알았기에 별 말이 없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에 반해 주둥아리는 바람 잘 날 없다. 이윽고 사각, 사각 하고 머리칼을 반듯이 자르는 소리가 난다. 귀신마냥 치렁치렁한 것을 단정한 기장으로 다듬으려니 손가락 두어 개 붙인 길이만치는 그만 석둑석둑 잘려나갔다. 넓은 유선지가 금세 빠듯히 채워지고, 손에 익지 않았을 짧뚱한 단도도 금세 제 수족마냥 익숙히 다루는 도사는 길게 코 울리며 웃는다. 필시 답하는 놈 말본새가 삐죽하니 골난 계집아이처럼 뾰로통하여 그렇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네가 거지의 삶을 알기야 하겠느냐. 날 적부터 비단 촉금에 싸여있던 당씨종가 도련놈이. 내가 눈 떠보니 웬 무결개 아해의 몸이었다고 입때까지 말한 적이 있었던가? 그놈 쪽박이 어찌나 깨끗한지, 하다못해 밥풀 한 알 말라붙은 흔적도 없었더라.”
십만개방도의 무결개, 매듭도 주어지지 않은 거지는 이러한 중원 바닥에 무수히 많으니 적당히 등급만 부여받을 뿐 말단조차 되지 못 하는, 하루하루 생사의 기로와 마주하는 이들이다. 당보는 가만히 앉아 이를 경청하다 입을 열었다.
“삐쩍 꼻아서 뼈랑 가죽 뿐이었겠구먼. 그렇게나 가련한 몸뚱이를 끌고 용케 여기까지 오르셨소이다, 이 당보가 기다리는 곳까지. 제아무리 도사 형님이라도 고초가 꽤 있으셨겠구려?”
빛바랜 머리칼이 툭툭 종이 위로 떨어진다. 어느새 소복히 뭉친 그것은 야트막한 언덕처럼 보일만치 쌓여 있었다. 장골께를 훌쩍 넘어 치골 밑까지 쭉쭉 뻗은 장발이 깡똥 잘려, 꼭 예전만 같은 길이가 되었다. 청명은 보란 듯 함뿍 웃으며 이죽거렸다.
“듣고 싶으냐? 맨정신으로는 다 말 못 하지. 술이 한 말 정도는 들어가야 내 입에서 뭐가 좀 나오게 될 거다.”
그러자 당보가 이르기를,
“에이잉, 그 양반 참 인색하기는. 좋습니다. 가기 전 하인들을 시켜, 가장 볕 잘 드는 후원에 술상을 차리라고 이르리다. 이맘때 즈음이면 오량액에 전흥대곡全興大曲주도 향이 깊게 익었을진저, …권력이 다 무어냐, 바로 이럴 때나 쓰는 것이지. 내 총관을 잘 을러 몇 동이 빼올테니 나중에 딴말하기 없깁니다.”
이르는 어조만 새침하니 결국엔 청명이 원하는 바를 내주겠다는 의미이다. 덕분에 목구멍 향긋하고 촉촉하게 사천을 뜰 수 있게 됐으니 청명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 그는 쾌재를 부르며 동작을 이만 멈추었다. 손질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당보가 호들갑을 떨며 면경을 찾았다. 머리에 땜빵은 안 생겼냐며 난리를 치기에 청명은 그의 정수리에 주먹부터 먼저 꽂고 모습을 비춰주었다. 당보는 비명을 지르며 쥐어박힌 머리를 감싸고 잉잉거렸지만, 이내 면경에 비춰진 제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귓바퀴를 빨갛게 물들이며 기쁜 기색을 띠었다.
“이야, 이게 뭐람. 우리 형님은 참 이럴 때 보면 의외라니까. 사람 아프게 두드려대는 데만 세상 능통한 줄 알았더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손재주가 좋아....”
그렇게 종알거리더니 다듬어진 머리칼을 참빗을 들어 정성스레 슥슥 빗는다. 일일히 상한 부분을 잘라내고 결까지 얼추 다듬으니 제법 멀끔한 테가 났다. 당보는 제딴에 윤기 자르르한 맵시를 낸답시고 동백기름까지 꺼내 와 탁탁 야물딱지게 친 다음 일어섰다. 이에 청명은 담담한 투로 손을 털며 의장을 가다듬는 꼬락서니를 본다. 인제 당보는 제게 가장 익숙했던 모양이 되었으나 이전과 꼭 같지는 않다. 허나 그것으로 마냥 애달프지만은 아니하였으니, 그가 무엇이 되었건, 지금 눈 앞의 상대가 저의 첫 그리고 마지막 지기임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문득 그는 당보가 허리를 숙여 무엇인가를 집어드는 것을 보다 유심히 관찰하였다. 깨지기 쉬운 유리玻璃를 다루듯 동작 자체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우니 그는 자연히 그러한 당보의 태도에 주목이 쏠렸다. 낯익은 물건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 삭아빠진 비녀도 날더러 새로 하나 해 달라고 시위하듯 꽂고 다니는 게냐? 너 돈 없어? 뭘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쓰고 앉았냐. 쪼개져도 이미 한참 전에 쪼개진 걸 순 어거지로 누덕누덕….”
“백날 형님이 거지새끼 거지새끼 하고 오만 욕을 다 하셨대도요, 그거 하나 장만 못할만치 돈이 궁했겠소. 저는 그냥 이게 좋아서 하는 겁니다.”
청명은 당보의 뒤이은 말에 그의 손에 들린 정홍비녀를 그제사 자세히 관찰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낡고 삭은 비녀는 수명을 다해 부러지려던 것을 금으로 녹여 떼운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꼴에 어떻게든 고쳐 써보겠답시고 빛깔을 새로 덮은 흔적도. 투박해 빠진 모양이 요즘 것처럼 잘 빠지지도 않았고, 제 값보다 몇십 배는 더했을 금으로 때운 모양이 개 발에 편자 같았다. 그 역할을 다한 물건에 집착하여 놓아주지 않으려 드는 것만큼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으나… 그것은 쓸모를 다했으니,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다 버리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당최 도사인 저도 쉽게 저지르지 못 하고 저어하는 것을, 어찌 당보에게만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비녀에서 시선을 거두고, 잘려나간 머리칼 몇 올이 가닥가닥 흩어진 바닥을 대강 손바닥으로 훔쳐 정리한다.
“…얼추 됐다. 가주나 보러 가 이야기하고 있어라. 데리러 갈 테니.”
“예, 먼저 가지요. 가주전에서 뵙시다.”
“…야.”
“예?”
“너 가거든 느그 손주한테 용채나 좀 두둑하게 달라 그래라.”
짤막한 부름에 돌아보자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전(錢) 모양으로 붙여 여보란듯 흔든다. 그 동작이 몹시 하찮고 경망스러운 것이, 속알맹이에 망백(望百)이 가까운 노고수가 들었다기보다는 쓰고 있는 껍데기대로의 개구쟁이 악동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에 말코 새끼가 어쩌고 하는 의미 없을 넋두리는 강물처럼 한 귀로 흘려 듣고, 청명은 당보가 고시랑대며 사라진 그 문으로 한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가주전과는 아예 반대 방향으로 꺾인, 공방으로 향하는 길이다. 품 속의 보퉁이를 숙직하던 장인에게 넘겨 주고, 무어라 짤막하게 전달한 뒤 돌아선다. 그리하여 말코와 독쟁이가 당문을 유유자적 나설 때 즈음에는 당군악이 헐레벌떡 공방으로 불려가게 될 것이나, 알 바는 아니었다.
“가주, 내 간만에 외야를 갈까 하오.”
당가는 당연히... …뒤집어졌다. 당가타 구중심처에서 은인자중하던 태태상장로가 돌연 예고도 없이 가주전에 불쑥 걸음하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저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 밥에 그 나물 아니랄까봐, 어느 말코 도사가 서두를 들이미는 방식과 제법 흡사했다. 당연히 당군악은 벌집을 쑤신 듯 혼미한 표정을 했다. 경장은 이미 꾸려 놓았으니 그런 줄 알도록. 통보에 가까운 말에 당군악은 어지럼증을 느끼는 듯 몇 번씩이나 마른세수를 하더니 당최 어디로 가실 예정이느냐 물었다. 당보가 이에 답하길,
“나는 화산으로 가네. 그렇잖아도 늙은이가 내내 기가 쇠하여 정양이 필요할 성 싶었는데, 때마침 가주가 보내준 말동무가 맹랑하게도 제집 섬서를 추천하더군. 공기 좋고 물도 좋고, 여하튼 영산(靈山)이니 기력 회복에도 더할 나위 없다나....”
각설하고, 통통하다 못해 터질 듯 두둑하게 살 오른 전낭과 함께 부디 그리하시라는 당군악의 기빨린 대답까지 듣고 나서야 당보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번졌다. 그리고 방 안의 두 당가인 모두 문 밖의 인기척을 알았다.
“끝나셨어요?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지. 들어오시게.”
방 주인이 그 안에 버젓이 들어있는데, 대답하는 목소리는 정작 딴 사람의 것이었다. 대강 내부의 상황을 예감한 청명이 제 미묘하게 치켜 올라간 입꼬리 위로 떠오른 짖궃음을 숨길 수 없음을 깨닫는다. 때마침 둘의 대화가 막바지에 이른 듯, 방 안의 기색은 여간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아주 미묘하게, 그러나 이 말코 도사가 익숙한 놈들이라면 누구나 금세 알아차릴 표정을 띄운 채 문지방 너머로 발을 디민다. 재밌어 죽겠는데 대놓고 낄낄대고 자지러질 수는 없어 나름대로 참고 있는 얼굴이었으니, 이른바 체면을 생각하여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스스로 지켜 주겠다는 것이다. 설명을 좀 해보란 듯 황망해진 당군악의 시선이 콕콕 찌르는 것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 청명은 속없는 사람처럼 그저 해맑은 모양으로 웃는다.
“보세요. 무슨 별일이 있으리라고. 이렇게 좋아하시는걸. 절 보시면 옛 친우가 생각이 나신다나?”
세상에서 가장 돈 밝히는 도사 놈의 눈이 빛살보다 빠르게 서안 위에 올려진 전낭 두께를 가늠하고, 천진함을 가장한 음흉한 미소가 조금 더 깊어진다.
“헤헤. 그럼 그렇게 알고 어르신은 제가 자알 모셔갈 테니 염려 마세요. 좋은 것도 잘 먹여 드리고,”
물론 네 전낭으로,
“재밌는 것도 많이 보여 드리고!”
그 역시 네 전낭으로.
“자주 소식 전해드릴 테니까!”
…한편 당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잽싸게 전낭 두께를 가늠하는 눈깔에 도사놈 면상을 꼬라보는 두 눈이 미묘하게 가느스름하다. 말코 새끼가 이런 식으로 평소에도 남의 집 기둥뿌리를 뽑아먹었구먼, 하고 짐짓 혀를 내두르는 낯짝이었다. 당군악은 기어코 두통이 이는지 번듯한 이마를 짚으며 혈자리를 꾹꾹 눌렀다.
“하하하. 그렇지. 내 이이를 보다보면 없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해서 말일세. 그러니 가주, 아무 염려 말고 이 늙은이의 신변을 맡겨 보세나. 어린 것이 백년 전 무존을 뫼실 기회를 받잡았답시고 저리도 신나하니, 추후 어떤 대접을 해줄런지 두고 보는 것도 하나의 여흥이 되지 않겠는가.”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보던 때는 언제고, 바로 입 싹 닫고 느긋하게 미소지어 보이는 것이 과연 속에 구렁이 수백 수천마리가 들끓는 뱀굴이 자리잡은 놈다웠다. 물론 당군악이 염두에 두는 것은 제 집안 태태상장로의 안위일 리 없었으나 두 인간 말종은 이미 그것을 다 알고서도 이런다는 것이었다. 지존에 오른 고수를 누가 섣불리 건드릴까. 이성 잃은 광인도 오줌을 지리며 눈을 까뒤집고 말겠지. ‘쓰읍. 어째 다 뜻대로 성사되긴 했는데, 이 새끼가 대놓고 '어린 것' 취급해대는 게 어째 은근슬쩍 꼴이 받네.’ 뫼시긴 누굴 뫼신다고. 아주 염병이 따로 없도다. 간밤에 그가 이 지고한 무존 침상을 강탈하여 쓰고, 머리채를 쥐어 흔들어댄 것으로도 모자라 정수리에 가차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는 사실을 당군악이 알거든 정말 심마가 와서 쓰러질지 모르는 일인데. 그래도 후손 보는 앞이니 짐짓 엄숙한 웃어른인 양 체면을 차리며 훈훈하게 실실대는 당보 놈의 대가리를 휘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군악만 아니었어도 이미 골통에서 수박 쪼개지는 소리 여러 번 났을 법한 괘씸함이었긴 하나, 이제 와서 뭘 어쩌겠나. 마냥 고분고분하기보다는 어느 한 군데 발칙하여 톡톡 쏘는 맛이 있는 마누라가 훨 배는 귀엽지.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결국 말코와 독쟁이는 옛적에 그랬듯 이번에도 당가를 한바탕 뒤집어놓고 대문을 나섰다. 이 또한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향수의 아뜩함인 것인지라. ㅡ
“어르신. 손을.”
…그렇게 대 사천당문의 태태상장로, 당대의 천하제일인 암존 당보가 백여 년 만에 세상에 나가는 순간, 그는 가장 먼저 전낭부터 뜯겼다. 내밀어진 손에는 용건이 없되 절로 벌어진 소매 안의 전낭을 자연스레 꺼내 제 품에 밀어넣는 솜씨가 아주 경력자의 그것이었다.
“어린 놈이 자알 뫼실 테니 비용 같은 건 일체 신경쓰지 마십쇼. 화산에는 위아래가 없으니 병아리 새끼들이랑 어우러질 각오도 하시고.”
얼씨구. 지가 매화검존인 거 밝히기 싫다는 티를 온 몸으로 다 내고 다녔음서. 당보는 고작 그 짧은 시간에 어린 놈 취급했다고 꼴받은 듯 굴어대는 말코 새끼의 쌍판을 한 번 지긋이 꼬라보았다. 그러더니 천연덕스럽게 주둥이에 기름칠을 했다.
“여부가 있겠는가. 자네가 섬서에서 소문난 개차반이라는 사실은 대 사천당가를 넘어 온 강호가 다 아는 사실인 것을. 지금도 오랜만에 유랑나온 늙은이가 집 대문을 넘자마자 용채삼아 받아온 전낭부터 바리바리 뜯어가는 꼴을 보면 아주 명징하지. 아암.”
어울리지도 않는 존대를 붙여 찔러오는 말본새를 고스란히 듣고 있다가, 그 옆을 걸으며 장단이나 두들겼다.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유치하게도 사이좋게 한 대씩 주고받은 꼴이다. 걷고 또 걸어 웅장한 대문을 나선 지 오래되었음에도 사천에서 이 맑은 빛 녹장포의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없는지, 두 사람의 앞길을 방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짙은 청색이 섞인 녹색 촉금이 한 보 딛을 때마다 나풀거렸다. 은사로 꽃과 나비, 그러니까 꼭 한 폭의 화접도를 수놓은 것은 높은 신분의 증빙이니 성도의 신민들이 이를 모를 리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쏟아지는 시선에는 아랑곳도 않고 당가타 부근을 벗어나, 왁자한 저잣거리를 터벅터벅 돌다가, 인파 바글바글한 어느 시전에 발길이 닿으면, 제 전낭을 날름 뜯어간 도사놈이 그새 군식을 사들고 와 당보의 입속으로 쑤셨다. 음식물이 가득 들어 툭 튀어나온 볼떼기에 청명은 낮게 킬킬대고 웃는다.
“한 자리에 궁둥이 붙이고만 사는 게 제일 성미에 안 맞는 놈이 투정도 많다. 그래, 간만에 나왔는데 어떠냐? 다리가 후들거리지는 않든?”
입에 들어온 것을 씹고 보니 사천 바닥에서 흔히 파는 고기 꼬치였다. 오물오물 씹어 꿀떡 삼키고는 히죽 입꼬리를 비틀더니, 곧 아주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예, 예. 그 또한 멀쩡합죠. 이 양반이 당보를 갓 태어난 새끼 염소 즈음으로 보시는가, 바람 한 번 불면 이우는 난초 한 송이 즈음으로 보시는가. 제가 한 서너 번 휘적휘적 하면 장강을 건넙니다. 제아무리 산세가 험하기로서니 설마 돌산 하나를 못 오를까봐?”
“…양심, 이 새끼야. 양심. 난초에, 새끼염소에, 아주 스스로 빗대어 말하는 것들마다 뻔뻔하기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지.”
“끌끌끌. 이 말코가 지 행동거지는 또 생각 안 하고 말을 막 뱉죠?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아주 바람 앞의 촛불 다루듯이 당보를 다루는 게 어디의 누구시더라.”
“요즘 바람 앞의 촛불은 오금도 까이고 머리채도 잡히나 보지?”
스스로 돌이켜도 다소 멋쩍은 행동을 부러 꼭 짚어 주니 툴툴대지 않을 연유가 없다. 허나 청명은, 그의 말이 썩 틀린 것도 아님을 안다. 말이야 바른말로 지금의 당보는 감히 현재의 그가 다다른 경지로서는 상대할 수 있는 인물조차 아니거니와 하물며 그런 이가 빗줄기 좀 맞고 돌산 좀 오른다고 연약하게 앓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신경이 쓰이지. 천연덕스런 대답에 머쓱해진 청명은 괜히 양 어깨를 으쓱하며 앞장서란 듯 등을 툭 떼민다.
“시끄럽고, 팍삭 늙어 그새 건망증이나 안 왔나 보자. 설마 화산 가는 길을 잊지는 않았겠지?”
“거 경공 수련은 꾸준히 하고 계시나 몰라. 당문 추뢰신법으로 푸른 기를 두르고 벼락같이 내달려도 암향표 먹장구름 두르고 단 세 걸음만에 훨훨 따라잡던 인간이. 도사 형님이나 뒤쳐지지 마쇼.”
얍실맞게 히쭉 웃고난 뒤엔 곧장 경공을 펼쳤다. 허공을 붕 나는 듯이 땅을 박차니 어느 새 거친 바람이 휙 뺨을 스친다. 날개처럼 녹의장포 휘날리는 방향을 보아하니 과연 섬서 직행이었다.
“옳다, 그래. 어디 오랜만에 암향표나 좀 견식해 봐라!”
청명, 이에 질세라 포탄이 쏘아지듯 뛰쳐오른다. 그들 둘은 훨훨 날아 공중을 땅흙 밟듯 박차고 달렸다. 그 기가 어찌나 거세고 빠른지 일부 양민들이 보기에는 검고 푸른 유성流星 두 줄기가 산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듯 보였다. 마른 하늘에 서슬 퍼런 벼락이 우르릉 울리고, 꽃 피는 봄날에 시꺼먼 먹장바람이 휘리릭 불어닥치는, 흡사 폭풍이 일어나는 듯한 진풍경이 펼쳐졌다. 도사놈이 해를 등지고 날아오르자 역광이 번뜩 일었다. 질끈 동여묶은 올 굵은 머리도, 무복도 장포도 둘다 검으니 그 모습이 검은 매와 같았다.
“내 집 가는 길을 너한테 지겠냐!”
“그건 모를 일이지!”
시름도 잊고 발밑이 둥실둥실 뜨는 기분을 느끼며 질주했다. 꼭 구름 위를 딛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약 이 장 정도쯤 벌어진 거리에서 도사놈이 허벅지 터지도록 내공을 박박 긁어모아, 온 힘을 다해 저를 쫓아오는 것도 아주 잘 느껴졌다. 당보는 짐짓 즐거운 듯 마구 소리내어 웃어대며 추진력을 높였다. 먹은 세월에 걸맞지 않게 환동하여 젊은 얼굴이니 그 웃음이 더욱 아이 같았다. 녹장포가 더욱 거세게 펄럭였다. 쏜살같이 튀어나간 푸른 인영이 바람을 갈랐다.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그야말로 신검합일(身劍合一)이 따로 없다. 발출한 비도처럼 쏘아지는 궤적을 좇아, 청명도 한차례 달음질쳤다. 저놈 저거, 전력으로 달려도 나란히 가기 힘든 걸 뻔히 알면서 갈수록 추진력 높여 대네. 작게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따라가는 낯짝이 전에 없이 밝았다. 등 뒤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나가는 스스로의 꼴이 어쩐지 즐거워 결국 함께 웃고야 만다. 온몸은 흠뻑 젖은 지 오래요, 염통이 터질 듯 박동하는 감각이 생생하게 반짝인다. 성도에서 낙현을 지나, 면죽관과 부현, 자동현을 훌훌 뛰어 제끼고 사천과 분지 사이의 검각剑阁을 밟으면 약 이백오십 리를 넘는 장황한 산맥이 굵다랗게 펼쳐져 있다. 춘절을 맞아 푸르고 옅은 싹이 돋아나는 보들보들한 땅흙을 즈려밟고 보법을 달리자니 문득 등골 찌릿한 해방감이 먼지 쌓인 가슴께를 쿡쿡 찔렀다. 그들 둘은 이윽고 진령산맥에 다다라, 낙안봉과 조양봉을 넘어 서봉의 연화봉 정상에 사뿐히 발을 디뎠다. 휭 하고 바람이 몰아닥치더니, 푸른 기가 거둬지고 먼저 도착한 것은 당연히 독쟁이 놈이었다.
“후우, 후… 집구석에 박혀서 요양만 했다던 놈이 어째 닳지도 않지? 너 이 새끼, 솔직히 불어. 그리 달관한 척 하면서 뒤에선 나 몰래 매일 수련하고 있었냐?”
파촉 땅 오르기가 하늘길 오르기보다 어렵다더니만, 서너 번 휘적거리면 장강도 건넌다던 지존의 옛 경지가 어디 가진 않은 듯 하여, 청명은 숨 가쁘도록 즐거운 한편 그가 문득 얄미워졌다. 허면 인제는, 제가 당보의 등을 보고 달리는 입장이 되어 보니 그제사 알겠는 것도 두루 있다. 저놈 저거, 가솔들 두고 어딜 가냐던 놈 맞나 싶게 신이 났다. 한껏 올라붙은 등이 꿈실대는 게 애새끼가 따로 없어 보고 있자니 절로 옅은 웃음이 피고야 만다. 이전의 독쟁이 놈은 제 등을 보고 달리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언젠가의 호시절, 이놈도 문득 웃음이 나올 때가 있었으련가? 그건 이제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장난 삼아 그 등판을 턱 갈긴다. 이에 당보, 볼우물 쌩끗 패여 웃었다. 숨길 수 없는 고양감이 입께에 담뿍 묻어 있었다.
“왜 그러시남, 벌써 숨이 턱끝까지 차고 올라오시네그려. 세월은 세월이지, 한 칠순 먹었을 때보단 기가 쇠했다는 소린 진심이었는데?”
“숨은 차도 회복은 금세 하고도 남지. 내가 이 길을 애들 데리고 묵철 수레까지 끌고 오고다녔거든?”
“허허, 이놈의 성질 더러운 말코 양반이 애들을 수레 끄는 말처럼 부려먹었나 보구먼. 평지도 아니고 이 빌어처먹게 험준한 돌산에?”
“나 좋자고 부려먹냐? 그게 다 애들 단단한 하체와 지구력에 큰 기반이 됐다 이거야. 인제 시키질 않아도 저들이 알아서 묵철 수레 끌고 이 돌산을 왔다갔다 쏘다니는데.”
청명은 다시금 깊게 숨을 몰아쉬며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듯 허리를 뒤로 쭈욱 접나 싶더니, 발 아래 놓인 화산 경치에 멈칫한다. 좀더 가까이 와서 보란 듯 옆의 녹포 소맷자락을 붙들고 주욱 당겨 오니 때마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 하늘이 온통 현란한 자하빛이다.
“산은 변한 게 없더라. 이 노을도 마찬가지고.”
노을이 붉게 타며 콧등과 뺨 위로 촛불처럼 은은한 주홍색이 일렁거렸다. 바람에 뻣뻣해진 머리카락이 주르륵 쏟아졌다. 볕을 입고 한층 더 밝은 갈색으로 빛나는 가닥들이 귀 뒤로 너울거렸다. 세필로 유려하게 그린 듯한 옆얼굴들. 그의 등은 넓고, 두툼하니 다소 고르지 못하게 갈라진 울퉁불퉁한 산세와 같았고.... 때때로, 그러한 위세가 그를 고루하지만 척박하게 보이게 함을 알았다. 칠십 먹었을 시절 질리도록 그 너른 등판을 보고, 가로막고, 가려지며 산 기억들이 재도 움튼다. 그 부피감이 벽에 박힌 초상처럼 싸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로 그렇군요. 예전에.... 뺀질나게 형님네 산문을 드나들던 그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소이다.”
사람은 변하고 백여 년이 지나면 한 길 트인 물길도 짐짓 틀어지는 법인데, 검의 날카로움을 자연물로 형상화한 듯한 이 바위산은 무뎌지지 않고 굳건히 도산(刀山)의 형태를 지키고 있다. 혹은 이 좁디 좁은 시계(視界)에 얽매여 드넓은 영산의 변화를 미처 잡아내지 못한 것일 테다.
“…”
제법 선선해진 밤바람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스친다. 주홍빛으로 물든 옆얼굴이 하도 밝아, 그 세밀한 생김이 노을에 뭉그러지듯 했다. 청명은 무심결에 장포자락 움킨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잠시간 자조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꿈결에서는 몇 번이고 본 장면이다. 그와 함께 화산의 풍광을 바라보는… 그러나 그는 제가 모르는 말을 한다.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을 한다. 그 미묘한 위화감에서 이것이 몽중이 아닌 현실임을 안다. 나도 제법 감상적인 놈으로 변했다니까. 낮게 콧바람 치듯 웃고는 소매를 마저 잡아당긴다. 둔중한 그 무게감이 기껍게 느껴진다.
“가자. 산은 그대로여도 건물은 제법 많이 변했다. 낡아 없어진 것도 있고 새로 지은 것들도 있고. 더 늦기 전에 장문인께 인사도 드려야지… … 운암진인이라고.”
당보는 콧등과 뺨, 이마 위로 쏟아지는 저녁놀을 만끽하듯 나긋하게 고개를 기울이다 답했다. 화산도 한차례 장문인이 바뀌었구나.
“예, 갑시다.”
칼날 같이 우뚝 솟은 산능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렸다. 허연 쑥돌들로 이루어진 뾰족뾰족한 봉우리는 그 흔한 들풀 하나 제대로 우거지지 않아 보기엔 꽤 휑했으나, 당가의 화려하게 깎아놓은 전각들에 비해 단촐하지만 심금을 탁 트이게 만드는 신묘한 힘이 있는 듯 했다. 그가 돌아오기 전, 제 처소에 처박혀 온종일 창문을 열고 저무는 놀구경을 하던 때를 문득 떠올렸다. 하늘은 불붙은 듯 타오르며 아름다웠으나, 어떠한 감상도 들지 않았다. 자작을 하고자 술잔을 창가 앞에 뒀음에도 맛이 돌지 않는 맹물 같았다. 잡아당기는 손의 힘이 기꺼웠다. 순순히 이끌려 가는 발걸음이 솜털 같았다. 산문은 현판을 갈아끼운 흔적이 있었다. 녹슨 문고리를 새로 달고 기둥에는 다시 칠을 한 것 같았다. 되살아난 흔적이다. 이곳은 그의 고향이고, 집이며, 처음 겪은 세상이고, 가슴을 펼 수 있는 유일한 심처였다. 가슴이 옥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화산파의 현판은 이미 한 번 내렸다 꽤 시간이 지나서야 새로 갈았다. 대현검이 손수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어 올렸다던 옛 현판은 청명이 화산에 다시 돌아왔을 당시 이미 어딘가로 팔려 나가고, 입때껏 행방이 묘연하였다. 화산이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였다. 청명은 당보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눈이 이곳저곳, 이전과 달라진 부분들을 샅샅이 훑는 것이 느껴졌다. 개중에는 화산이 끝내 지키지 못한 것, 잃은 것, 그럼에도 다시 세운 것, 새로이 만든 것이 있었다. 이는 제법 기이하고도 오묘한 감상이 일게 했다. 우리는 백 년 전과 같되 다른 사람이 되어, 역시 같되 다른 화산으로 돌아왔다. 둘 다 겉은 제법 달라졌을지 모르나 그 심지는 같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고. 허나 당보는 속으로 장탄하였다. 그 상천上天한 필로를 다시 볼 수 없다니. 척 보기엔 담백하지만 마냥 슴슴하지도 않고, 때로는 용과 대망大蟒이 못 속에서 머리와 꼬리를 추켜올리듯 거친 구석이 알음알음 있으나, 그 본질이 결코 조야하지 않은 이였다. 예, 그 놈입니다. 제가 죽지도 않고 또 왔습니다. 변하는 것은 끝내 사람이다. 고루한 전통과 옛 관례는 새로운 터돌을 박을 곳을 가리기 위한 교본이자 보얗게 먼지 쌓인 해묵은 지혜로, 고저 밑바탕에 지나지 않는다. 도문도 세가도 첫 보를 내딛을 단초는 동일하지만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사람간의 합일이었을 것이다. 문득 제 옆을 당당히 걷고 있는 그는, 새로운 사람임을 뼈가 시리도록 체감하기에 이르른다. 이 또한 오랜 동상이몽이다. 산문을 여젖히자 끽 하고 경첩 삐그덕대는 소음이 귀를 긁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