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탐 @tam82930524
일장춘몽: 解
청명당보
청명은 한때 이렇게 생각했다.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강호에 버려지다니. ……천마만 썰면 뒤도 안 돌아보고 등선해 주마.
매화검존. 대산혈사의 마지막 생존자. 고금제일마의 목을 그 손으로 떨어트리고 중원의 마도천하를 막은 자. 그러나 그보다 천마의 재래(再來)를 확신한 사람은 없었다. 그 믿음은 결코 신앙이 아니었으나 확고함만은 교도를 압도했으니 큰 역설이었다. 두 번째 생을 맞은 그는 가용한 자원을 전부 쏟아부어 다가올 전쟁에 대비했다. 그가 촌부의 마음으로 한 푼 두 푼 부지런히 저축한 금전, 명문거파 수전노들이 축재하였다가 기부금이란 바람직한 이름으로 세탁되어 천우맹의 곳간에 들어온 재물, 그 자신의 힘, 굳이 눈에 넣어서 아플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제자들이나 그냥 가만히 있어도 눈꼴신 강호인들의 무력이 골고루 갈려 들어갔다. 경험자인 그가 총사로서 맹을 이끌었으나, 아군의 형편이 전생보다 낫지는 않았다. 사실은 부족했다. 일단은 중원이 폭삭 내려앉을 뻔한 전쟁으로부터 이 갑자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기에 평균적인 무위의 수준이 전보다 못했단 문제가 있었다. 한편, 동전의 양면처럼 다행인 점도 있었는데, 바로 쪽박이 깨진 건 마찬가지라 마교의 수준도 전생에 비하면 한참 미달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이제 최고수들 각각의 역량이 쟁점인데…….
- 만약 백 년 전 우리가 옛 고수들처럼 어느 날 한적한 곳에 모여 정정당당하게 일대일 생사투란 낭만적인 짓거리를 벌였다면? 다 죽었겠지. 장담하건대 대산혈사를 직접 봤으면 ‘영웅’ 같은 소리는 안 나왔을 거다. 아군이란 것들도 죄다 피 칠갑하고 눈 뒤집힌 놈밖에 없었어. 그놈들이 떼로 달려들어서 한 놈은 바짓가랑이 잡다 죽고 한 놈은 머리끄댕이 잡으려다 죽고. 나는 픽픽 나자빠지는 사형제들 사이를 지나쳐서 겨우……. 에라. 두 번은 못 해 먹을 짓인데 또 하라네. 환장할 팔자야. 이 염병할 인생아. 최소한 무위라도 돌려주든가? 아, 진다는 생각은 안 해. 왜 해? 안 져야지. 내가 끌어들인 놈들이 몇인데, 이것들 싹 뒈지는 꼴 보려고 여태 먹이고 입히고 궁둥이 닦아주면서 밤낮 뒷바라지한 줄 알아? 수련은 항상 고생스럽게 하지. 성취도 빨라. 빠른데……. 그 개새끼는 빌어먹을 마공인지 뭔지 날로 먹는 건 아닌가 몰라? 눈짓만 까딱해도 제 내공을 바닥까지 득득 긁어 바칠 놈이 발에 채일 거 아니야. 하, 인간을 뭔 개미만도 못 하게 취급하는 새끼인데 내공은 또 받아먹는다면 꽤 웃긴 일이겠어. 황당한 세상이야. 세상 어느 신이 개미똥구녕까지 쭉쭉 빨…….
- 저 인간 누가 술 줬냐? 저기요. 여기서 주사 부리면 안 되세요.
- 술은, 뉘가 술을 마셨단 거야! 한 병 주기나 하든지! 하여튼 요즘 것들은 말이야. 아주, 응? 틈만 나면 늙은이라 괄시하고…….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청명은 초조해져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빠르게 중얼거렸다. 고도로 발달한 구시렁거림은 술주정과 구분할 수 없기에 지나가던 제자들은 착각하곤 했다. 그럼 그 건방지고 젖살 통통한 얼굴에 대고 벌컥 역증을 내며 내심 생각하는 것이었다. 저 철없고 어린것들, 인간 만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팔 하나가 아니라 사지 전부가 날아가더라도 내 선에서 끝내고 저것들은 곱게 되돌려 보내야지. 그러니까 애초부터 청명이 상정한 미래의 제 모습은 비교적 멀쩡한 시체에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체 사이에 있었다. 남길 면적만 좀 다를 뿐 등선은 정해진 수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청명은 사지도 모자라 목숨까지 붙은 시체로 살아남았다. 살았으면 더는 시체가 아니지만 아무튼. 청명의 간곡하고도 약간 야비한 기도가 하늘에 닿아, 지난 생의 발끝에도 못 미친 천마와 부딪친 것은 아니었다. 천마는 오히려 더 완성되어 있었고 전황은 한때 절망적인 순간까지 치달았다. 다만 청명과 그의 제자들이 전쟁 중에 스스로 벽을 허물고 천마를 압도한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 승리는 천우맹에게 돌아갔다. 전생처럼 공멸(共滅)에 가까운, 기뻐할 수도, 기뻐할 사람도 없는 승리가 아니라 함께 살아서 기쁘다고 끌어안을 전우가 있고, 돌아와서 기쁘다고 반겨줄 사문도 있는 승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큰 기쁨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익숙해지고 덤덤해진다. 평상심으로 돌아온 청명은 자신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 부닥쳤음을 눈치챘다. 인간을 초월한 천마를 뛰어넘고 만 청명. 그는 이제 현생을 뜨고 싶어도 뜰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
“아악, 사형! 장문사형!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는 말 안 해줬잖수!”
안 해줬잖수……, 안 해줬잖수……, 줬잖수……, 수……. 화산의 제자마저 출입이 통제된 골짜기 방향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새벽 수련에 나섰던 삼대제자들은 무리동물의 새끼들처럼 다닥다닥 뭉쳤다. 다행히 근처엔 먼저 수련에 임했던 이대제자가 있었다. 같은 배분에서도 늠름함이 남달라 뭇제자들이 흠모하는 그는 두려움에 떠는 사질들을 안심시켜주었다.
“저 소리 말이냐. 나도 입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무척 놀랐지. 사부께 여쭈었더니 종머시기산과 같은 허접한 산과 달리, 영산인 화산에선 이상현상도 잘 일어난다더군. 사람 말소리와 닮은 울음소리를 가진 짐승이 있어도 놀랍지 않음이야.”
“예? 사고. 사람 말을 흉내내는 짐승이라면 혹시 모를 일이니 잡거나 쫓아내는 게 옳지 않습니까? 그것도 저렇게 발작……? 악……? 도저히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기운이 보통 흉흉하지 않습니다.”
“말조심하도록. 저것은 대사부께서 젊은 시절에도 있었다는 화산의 터줏대감이야. 사람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단지 네 귀에 거슬린단 이유로 해한다는 말이냐. 우리는 무인이기 전에 도인임을 명심해라. 새의 지저귐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 아니듯 저 괴물의 포효 또한 마찬가지니라.”
“괴물이요?”
“어허.”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되었다. 그리고 앞으론 이리 아무렇게나 모여 있지 마라. 한 번에 잘 물어가라고 그러는 거냐. 방진을 배웠으면 써먹어야지.”
“…….”
삼대제자들은 반성하며 고개를 숙였다. 도인과 무인, 어느 입장에서나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이 문답을 알 리 없는 괴물, 아니 청명은 제 처소에서 술병 두 개를 동시에 입에 꽂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두 병 분량의 화주가 꼴꼴거리며 위장까지 바로 쏟아졌다. 누군가 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그야말로 목구멍을 상시 개방할 수 있는 기이한 무공이 존재하여, 통달한 것이라 여길 터였다. 청명은 텅 빈 병을 등 뒤로 던졌다. 휙 날아간 그것은 이미 굴러다니고 있던 병들 사이에 섞였다. 술병 사이엔 꽤 좋은 종이도 끼어 있었다. ‘환우제일매화무적검황(寰宇第一梅花無敵劍皇)께 바치나이다’ 같은 문구가 보였다가 말았다. 이 환우제일매화무적검황이란 수십 년 전, 정식 도호를 받기 전엔 조씨 성을 사용했고 모 상단 가문의 공자 출신인 걸떤 장로의 입방정에서 시작된 별호였다.
어느 날 그의 제자가 물었다. 사부님, 대체 저 골짜기엔 무엇이 있기에 출입을 금하는 겁니까. 장로는 늘 그랬듯이 사형제끼리 의논하여 정한 거짓말을 뱉으려 했으나, 제자의 파랗게 질린 얼굴에 순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괴물이 아니라 좀 회까닥한 네 사숙이란다. 애는 착해. 음, 안 착한데 착해.’ 이렇게 솔직히 말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화산의 제자들이 사제를 무서운 괴물이라 오해하진 않길 바랐다. 사실 웬만한 괴물보다 더 무서운 놈이긴 해도 그는 화산, 나아가 중원을 지켜낸 영웅이 아닌가. 진실을 암시할 방법이 정녕 없나.
- 쉿. 저것의 별호는 환우제일매화무적검황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나불댄 다음이었다. 이는 장로의 고질병이었다. ‘사형은 그냥 말을 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입을 안 여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는, 당 모 명문가 출신 사매의 충언이 뒤통수를 확 쌔리듯 떠올랐다. 말실수했단 걸 들키면 정말 뒤통수에 무언가 독한 것이 날아올지 몰랐다.
- ……비밀이니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장로는 재빨리 수습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희한한 일이었다. 삼 주야를 지나지 않아 화산에서 이 별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비밀인데……’,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의 뒤에 오는 말은 앞말이 없을 때보다 세 배쯤 빨리 전파된다는 신묘한 법칙이 관여한 탓이었다. 어쨌든 이 ‘환우제일매화무적검황’, 무려 열 자에 이르는 별호는 너무 길어서 꼭 누군가는 한두 자 빼먹거나 발음할 때 혀를 씹었다. 실수는 웃음을 부른다. 반복되면 그냥 별호 자체가 웃긴 것 같은 혼동이 생긴다. 별호로 칭했을 뿐인데 약간 괴물을 조롱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고, 이렇게 조롱하는데도 별일이 생기지 않으니 점점 어? 그 괴물 별거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물론 다시 괴물의 포효를 들으면 겁을 먹고 오들오들 떨겠지만. 몇몇 간이 배 밖에 나온 제자들은 술을 사서 골짜기 근처에 놓아두기도 했다. ‘환우제일매화무적검황께 바치나이다’란 문구는 그렇게 시작됐다.
청명 입장에선 황당한 소동이었으나, 장로는 물론 그 제자마저 선경에 오른 지금은 그들을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추억이었다. 청명은 사형제와의 즐거웠던 한때를 회상한 후 말했다.
“조걸도 모자라 그 제자한테도 추월당하다니 이 무슨 개같은 경우가 다 있냐고!”
청명은 한참을 더 징징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처음 시야를 채우는 건 짙은 초록이었다. 그것이 스르륵 움직이니 표면의 굴곡을 타고 윤기가 차르르 돌았다. 그 빛깔의 우아함이 퍽 예사롭지 않았는데 마치 촉금(蜀锦)을 연상케 했다. ‘서촉에선 별벽(蹩躄: 절름발이와 앉은뱅이)도 가족을 먹인단 말을 들어보셨소? 승상께선 위(魏)에 비단과 자수를 판 돈으로 병사를 일으켰고, 당의 황제는 촉금으로 지은 용포를 입었지요!’ 우쭐대는 어투도 귀에 선했다. 청명이 한참 보았더니 그것도 서서히 정체를 드러냈다. 집채만 한 뱀이었다. 촉금 장포라 여긴 건 그 전신을 감싼 사피(蛇皮)였다. 뱀은 잠시 제 자태를 자랑하듯 이리저리 꿈틀거리더니 곧 허물을 벗어내기 시작했다. 한 겹, 또 한 겹……. 계속해서 허물을 벗을 때마다 뱀은 몸집이 줄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뱀은 새끼손가락보다도 작고 가느다란 새끼뱀이 되었다. 청명은 어쩐지 그 새끼뱀이 반가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뱀은 화들짝 놀라 달음질쳤다. 청명은 그것이 부리나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직감하길, 놈은 사천으로 튀었다.
- 아니, 이……! 야, 이 자식아……!
청명은 정확한 까닭도 모르고 분통을 터트렸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눈에 불똥이 튀어 번쩍 뜨일 정도였다.
“…….”
실제로도 눈을 뜬 청명은 제가 다 쓰러져 가는 초옥에서 깬 걸 발견했다. ……어디더라? 처소임을 잊은 게 아니라 ‘언제’ 처소인지가 모호했다. 그의 첫 번째 처소, 즉 청문, 청진과 함께 지내다 훗날 사부에게서 물려받은 초옥…… 사실 사형제들이 제자를 받아 독립할 동안 혼자 빈둥거리다 보니 제 차지가 된 것이지만, 여하튼 그 초옥이나, 두 번째 생에 들어앉은 초옥이나 허름함과 너저분한 상태가 공교롭게도 고만고만하여 자다 깨서 보면 거기가 거기였다. 심지어는 맨바닥이 굴러다니는 술병에 전부 가려지면 장문인이란 사람들이 쫓아와 잔소릴 쏴대는 것도 비슷했다. 네놈이 어둠의 자식이냐! 귀신 나오겠다! 이런 돼지우리가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겠느냐! 돼지가 보면 형님, 하겠어! 이 대사들은 왜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을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두리번거리던 청명의 눈에 ‘환우제일매화무적검황께 바치나이다’란 종이가 들어왔다. 그는 이곳이 두 번째 초옥임을 깨닫고 몸에 힘을 풀었다.
“정말 뭐였지?”
근래 꾼 것 중에 유달리 성질을 건드리는 꿈이었던 지라 청명은 미간을 모았다. 뱀이 호로록 허물을 벗는 장면이며, 새끼가 되어 줄행랑치는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왜 사천으로 갔다고 확신했지? 사천이라. 그러고 보니 당가에 들른 지도 퍽 오래 전이었다. 초옥에 틀어박힌 후에도 종종 그곳은 들여다보았으나 어느 날 화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다. 술잔 나눌 녀석들이 차례차례 떠나기도 했고, 예전처럼 청명이 나서서 묵은 고름을 찢어주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치고받고 걸쭉한 덕담까지 나눌 만큼 성장하지 않았나. 문파끼리도 잘 지내고. 무엇보다 화산에 거리를 두게 된 이유와도 같은데, 늙은이가 언제까지나 후손을 감시하면서 제 아집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그다지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다는…….
“……아이, 이거. 여간 뒤숭숭해야지. 나중에 올라갔을 때 바가지 긁으면 어찌해? 간만에 슬쩌그리 둘러보고 와? 어차피 알아보는 놈도 없겠다, 무슨 큰 야단이 났는지만 몰래…….”
당보야, 당보야. 이리 장한 사내를 또 어디서 만날 것이냐? 하여튼 자식이. 너라도 가서 원시천존 앞에 드러눕고 시위하고 어? 그랬어야지. 직녀도 일 년에 한 번은 배필과 해후하는 마당에 너는 삼 백 년이 넘도록 독수공방일 수 있느냐고 곡도 좀 하고. 청명은 중얼거리다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베틀 앞에 앉은 당보를 상상했다. 직녀가 견우를 만나러 간다며 일을 떠맡긴 것이다. 당보가 서럽게 잉잉거리자 누군가 매섭게 구박했다. ‘네 이놈! 촉한의 비단이 하늘의 비단 못지않다며 뽐내지 않았더냐!’ ‘그치만 부당하고 또 불합리하오. 이 당보는 장인이 아니오라 무인인데…….’ ‘시끄럽다! 익주의 사업에 대해선 먼저 온 공명이 다 불었거늘, 어서 짜지 못할까!’ ‘이런 제갈세가! 이런 제갈세가!’ 큭큭 웃던 청명이 우뚝 멈추었다. 상상 속 당보가 짜내는 촉금이 꽤 낯이 익은 탓이다. 그야 당보가 늘 걸치고 다녔던, 사천당가를 상징하는 그 녹장포의 비단이니 당연하다마는. 청명이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겹겹이 쌓인 비단은 이내 뱀의 똬리로 변했다. 꿈에서 본 그 뱀이었다.
청명은 벌떡 일어났다. 문을 박찬 다음 한 걸음에 절벽을 딛고, 두 걸음에 허공을 훌쩍 뛰어넘었다. 암석 위에 착지하자 발바닥에서 찌르르 진동이 올라왔다. 아, 어쩐지 무척 간지러워 웃음이 나왔다. 뺨을 스치지도 못한 바람을 등 뒤로 따돌리니, 느릿느릿 동이 트는 해는 의당 그를 뒤쫓지 못하리라. 청명은 이제서야 뱀이 달음질치며 비명처럼 내지른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저는 당가인이라니까요!
나 참. 누가 이번 생엔 화산에 입문하랬나? 사람이 반가워하는데 면전에 대고 기겁하며 도망치는 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냔 말이야. 적어도 ‘저 왔소. 그간 어찌 지내셨소.’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뭐, 한번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간 두 번 다시 벗어날 수 없기라도 할까 봐? 선계에서 눈치만 수련했나……. 청명은 괜히 툴툴거리다가 맑은 샘을 발견하고 멈췄다. 당가에 가더라도 지금은 얼굴 익힌 자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그 매화검존이고 환우제일매화무적……이 아니라 화산검협이라 밝혀도 너무 꾀죄죄한 행색으로 등장하면 안 들여보낼 것 같았다. 당보가 어떤 신분일진 모르겠지만 쉽게 대면시켜 주지도 않을 것 같고. 청명도 이제 체면이란 걸 약간은 아는 사람이었다. 한창 피 끓던 시절처럼 토라져서 집으로 돌아가 버린 당보를 쿵쾅쿵쾅 쫓아 들어간다든가, 내 배필 어디에 숨기었느냐, 데려와라 행패 부린다든가 동네 시끄럽게 굴 생각은 전연 없었다. 당보를 찾겠노라고 그 으리으리한 장원을 다 뒤집어 놓을 바엔 그냥 적당한 핑계를 대고 둘러보다가 발견하면 눈도장만 찍을 테다. 이제 다음에 혼자 있을 때 살짝 불러내서…… 가만. 그놈 올해 몇이려나? 너무 어리면 유괴범으로 몰릴지도. 아아니, 딱히 화산이나 어디 풍경 좋은 데로 데려갈 생각을 한 건 아니고. 물론 본인의 요청 및 은근한 암시 혹은 유혹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청명은 얼굴을 닦은 후 물 묻은 손으로 머리를 쓱쓱 넘겼다.
“근데 뱀이…… 너무 새끼 아니었나……?”
청명의 꿈은 유익한 실마리를 잘 제공하는 편이다. 특히 꾼 직후엔 뭔가 뜬금없다 싶을수록 훗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당보가 현세에 내려왔단 암시도 꿈에서 얻은 만큼, 더 세세하게 해몽해 보면 당보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사피의 색이 직계만 걸치는 장포처럼 진녹색인 것으로 보아 당보는 이번에도 직계일 가능성이 크다. 또 연령대는 생각보다…… 꽤…… 음. 정말 많이 어릴지도? 청명은 어느 날 갑자기 십 대 소년의 몸에서 자신을 자각했다지만, 당보는 좀 다를지도 몰랐다. 꿈에서 그렇게 작은 뱀으로 나타났으니 이제 막 태어났거나…… 혹은 잉태된…….
“에이, 설마.”
청명은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몇 걸음을 더 걷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유,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놈 배필인데 아무렴. 내가 꾼 게 태몽이겠어? 까르르, 농담도 참. 하하하. 후후후. 아이, 재밌다. 세상에 제 배필의 태몽을 꾼 놈도 있다니. 낄낄낄. 정말 웃긴 이야기…….
“사형! 장문사혀엉!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오! 크아아악!”
- 이 자식은 이제 뭐만 있으면 내 탓을 하네.
청명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별 황당한 소릴 다 듣는다는 듯 대꾸하는 청문의 환청이 들린 듯했으나 청명의 포효는 더욱 흉포해질 뿐이었다. 소리만 아니라 그 기세가 너무도 살기등등하게 산을 진동시키었기에, 화산의 제자들은 깜짝 놀라 황급히 술과 종이, 붓을 찾았다.
“바, 바치나이다, 바치나이다. 환우제일매화무적검황께 이 술을 몽땅……. 부디 진노를 거두시옵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