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솟대  ​@sotdae_17

프시케

​청명당보

“네? 청명이가 결혼이요?”

 

청문은 몹시 정중한 태도로 서랍에서 귀이개를 꺼내 귀를 깨끗하게 파냈다. 뭐가 묻어나오지도 않은 귀이개를 꼭꼭 닦아 다시 서랍에 집어넣은 청문이 공손하게 자리에 앉았다.

 

“제가 요즘 몸이 좋지 않아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청문아. 멕이는 솜씨가 나날이 늘어가는구나.”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셨어야지요.”

 

단정한 얼굴에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잔소리 두 시진치는 쏟아낼 각이었다. 백오는 황급히 손을 들어 변명했다.

 

“내가 아니다! 내가 미쳤다고 나서서 그런 짓을 하겠느냐. 남의 집 아가씨 인생 망쳐 놓을 것도 아니고.”

 

“아니! 상대야 어쨌든 청명이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약관을 넘겼으면 아주 어리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부님께서는 그 망발에 동의하셨다는 말입니까?!”

 

백오가 과격한 단어 선정에 기겁하며 얼른 기막을 둘렀다. 그리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소리임에도 불안했는지 목소리를 줄여 소근거리듯 다그쳤다.

 

“망발이라니! 이거 장문인께서 정하신 일이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셨다고 망발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요! 저조차도 오늘 처음 듣는 일을 어떻게 마음대로 결정하실 수 있습니까? 제가 당장 가서 연유를 여쭈어야겠습니다. 예의를 갖출 테니 걱정 마시고 잠시만 기다리시면-”

 

“청문아 제발!”

 

백오가 거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다시피 하여 겨우 진정된 청문이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사부라는 것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왜 청명이 일을 자기가 처음 들었다는 것을 어이없다는 듯이 따지는 걸까? 제자의 대소사는 사부가 볼 일이지 사형의 일이라고는 볼 수 없을 텐데. 물론 이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무쓸모했다. 다른 모든 일에는 침착하고 어른의 말을 우선으로 여기는 아이가 청명이 관련된 일에는 도무지 굽힘이 없으니 원. 물론 사형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청문이 청명을 어찌나 아끼고 싸고도는지 그 고집의 빈도가 적지 않는 데 있다. 그나마 청명을 가장 호되게 붙들고 혼내는 것도 청문인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도 대제자로서 편애가 극심하다는 평가 정도는 밥 먹듯 듣게 되었을....

 

“그래서요?”

 

극심하긴 하다. 저거 지금 눈 돌아가는 거 봐라.

 

“그래서는 무슨, 장문인 결정이라는 거지.”

 

백오는 어물쩍 물러나려 했으나 청문이 놓아주지 않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청명이는 아직 어립니다. 사람의 성숙이란 그 살아온 세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약관을 겨우 넘긴 것도, 제가 보기에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태도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청명이가 또래의 아이들보다 관계 맺기에 서투르다는 것은 사부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일이 아닙니까.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 응당 거쳐야 할 과정들이 필요하다고 제가 몇 번이나 주장했을 텐데요.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로 다른 제자들과 섞일 자리를 마련치 않으셨던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상처도 되고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 연습을 시키지 않은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진이가 있지 않았더라면 여즉 사형제들과 물과 기름처럼 날카로웠을지도 모를 아이입니다. 지금까지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곧잘 폭력을 쓰지 않습니까. 해서 그나마 제가 더 오래 끼고 가르쳐 낫게 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청산유수다.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줄줄 쏟아져나오는 말 사이사이에 콕콕 찌르는 지적도 섞어서. 백오는 으응, 하고 어중띤 대답을 했다.

 

“그런데!”

 

눈을 피하는 스승과 똑바로 바라보는 제자. 어느 쪽이 더 떳떳한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아이를 냅다 결혼시키시겠다고요?”

 

“가정이 생기면 좀 더 어른스러워지지 않겠느냐, 하시는 말씀이....”

 

“책임질 준비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덜렁 짐을 지운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되려 갑작스럽게 큰 상처를 받으면 어쩌려고요! 사부님도 준비 없이 청명이를 받아서 힘들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래도 애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지 않느냐. 너무 기다리기만 하는 것보다 적당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흠흠, 청명이가 의외로 머리가 좋기는 하지요.”

 

좋다고는 안 했는데? 머리가 좋은 아이가 같은 사고를 치고 또 치나? 그러나 청문의 도끼눈이 슬쩍 누그러졌으므로 백오는 얼른 말을 이었다.

 

“우리끼리 정한 거였다면 당연히 나도 반대했을 거다. 하지만 각 문의 장끼리 이야기가 된 사항이니 무어라 하겠느냐? 화산이 타문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모양을 만들어서는 안 되지 않으냐.”

 

“타문이라니, 다른 문파에 청명이를 보내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설마! 그 어린 아이를!”

 

“아니니까 눈 그렇게 뜨지 말거라. 별로 어리지도 않은.... 아니, 어차피 진산제자는 혼인해도 화산에 자리를 잡잖느냐. 애초부터 그러자고 당가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하더라.”

 

“당가.... 그 사천당가 말씀이십니까?”

 

청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 엄격하고 폐쇄적인 가문에서 이렇게 덜컥 전조도 없이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는 전에 들어본 적 없었다.

 

“그래. 그쪽에서도 화산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게지.”

 

“......좋은 관계요? 청명이로요?”

 

“크흠.”

 

그것은 참 옳은 지적이었다. 청문은 다시 의심 가득한 눈이 되어 말했다.

 

“사람이 검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다른 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요.”

 

“그렇지. 나도 괜히 곱게 자란 세가 여식에게 봉변을 겪게 하는 것 아닌가 했다만.”

 

백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청명이 이야기는 으레 화제로 나오지 않느냐, 각 문의 적당한 후기지수 이야기야 원래 대화에 자주 오르는 것이고. 한데 그 말을 듣던 당가주가 갑자기 혼사 이야기를 꺼내더란다. 처치곤란인 딸이 있다고, 재능은 있는데 성격이 유순하지가 못해 골치라고-”

 

“지금 골칫거리를 청명이에게 떠넘기겠단 말입니까?”

 

“떠넘기는 게 아니라.... 음, 그러니까 비슷한 성격끼리는 잘 맞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사부님께서는 혹시 경단이 맛있다고 소면에 넣어 드십니까?”

 

백오는 눈을 꾸욱 감았다. 아주 욕을 해라, 욕을.

 

“기대를 해본 것은 사실이나 잘 맞지 않아도 괜찮다. 애초 청명을 고른 것도 그 아이가 겉돌기 때문이 큰 듯 했다. 말이 새지 않기를 바라는 거겠지. 그 정도로 골치라면 여기서 맡아만 주어도 우호적으로 여길 것이니 괘념치 않아도 된다.”

 

“관계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청명이는 많은 것이 서투릅니다. 어떤 결과가 될지-”

 

“당가에 적을 둘 곳이 없다 한다.”

 

청문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럴 수가 있나? 당가주의 자식은 모두, 당가주의 자식이다. 말장난이 아니다. 어떤 모친에게서 태어나든 결코 어미의 자식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아비 아래로 귀속된다. 어미가 천하든, 죄인이든,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다 한들 당가의 혈육에 대한 집착은 변함없다. 문제가 있으면 차라리 가문의 심처에 가둔다면 모를까, 둘 곳이 없다고?

 

“하여 어찌 대해도 탓하지 않을 테니 청명이의 성격 부분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청문의 얼굴이 굳었다.

 

 

 

 

 

“청명아.”

 

“네? 제가 안 했어요!”

 

“.......”

 

청문이 침착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시천존이시여....

 

“뭔가 잘못한 게 있느냐?”

 

“어, 어.... 없어요.”

 

있네, 있어. 어찌 하루를 조용히 넘어가질 못할까. 청문은 우선 뭘 저질렀는지 추궁할까 하다가 그냥 청명의 옆에 앉아 버렸다.

 

“사형?”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보는 얼굴은 십여 년 전과 다를 바 없이 말갛다. 이십여 년 전보다는 자랐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이런 걸 어떻게 장가를 보낸단 말인가? 청문은 제 곁을 툭툭 쳤다.

 

“앉거라. 이야기할 것이 있단다.”

 

청명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슬그머니 청문의 곁에 앉았다. 청문이 혼을 내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청명아. 혼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네?”

 

청명은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거 뭐 둘이 좋아 지내다가 눈 맞고 배 맞으면 같이 살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요?”

 

청명아, 너는 도사다. 다른 좋은 말 놔두고 왜 항상 그런 식이냐? 청문은 목끝까지 올라오는 꾸중을 참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다른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니까.

 

“물론 혼인에 있어서 당사자들의 서로 아끼는 마음이 가장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맞단다.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권세가나 대문파에서는 순서가 조금 다를 때도 있다.”

 

“아, 그 돈이나 권력이랑 자식을 바꿔먹는 거요?”

 

“콜록!”

 

적나라한 표현에 눈물이 찔끔 난다. 청문이 가장 괴로운 점은, 스스로도 거기에 반박하기 어렵다는 부분이었다. 자식의 혼사로 어른들의 이득을 찾는 짓 맞지 않나!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사부를 한번 들이받아볼까? 아무리 사문의 명이라지만 내가 어떻게 청명이 너를 당가에 팔아먹겠니! 나는 절대, 절대로 너를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하지만 청문은 일단 들은 바를 전하기는 하기로 했다.

 

“그렇...기만 하다고는 할 수 없지. 여러 조건과 시운이 맞아 생긴 인연이라도 존중하며 함께하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으니까.”

 

“네에. 그런데 갑자기 왜요?”

 

“장문인께서....”

 

청문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아 한번 헛기침했다.

 

“감기에요? 무인이 칠칠맞게.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아니, 아니다. 네가 이제 약관의 나이가 아니니.”

 

“네.”

 

“혼담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네?”

 

청명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까, 암, 빡.

 

“저 도산데?”

 

“알지. 그래도 화산은 혼사를 금하지는 않잖으냐. 가까이는 백지 사숙도 처자식을 두셨고.”

 

“아니, 그래도.”

 

“일단 만나만 봐라.”

 

“와.... 사형, 어른처럼 말하네요. 이제 이래 놓곤 혼사까지 치르라고 압박 주는 거죠? 혼사 치르고 나면 자식은 언제 보느냐고 잔소리하고?”

 

“내 참. 진짜로 하는 말이다. 위에서는 당장 입적시키자는 걸 물려 놨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너를 어떻게 주느냐. 이런 건 확정되기 전까진 조용히 진행하는 게 나으니, 너는 어느 가문에서 누굴 보낸 건지도 알 필요 없다. 사람이 중하지. 최대한 조용히 한번 만나 보고, 너와 맞는 사람이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다오. 파투 낼 테니까.”

 

“그럴 거면 애초에 왜 만나게 해요?”

 

청문이 조용한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집에서 별로 아껴주지 않는 것 같아. 내버리는 물건 대하듯 말하더구나. 그런 아이를 우리가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거절당한 것마저 하자로 여기지는 않을까. 그런 집에 내버려둬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하지만 청문은 그런 것들을 말로 하지는 않았다. 청명에게는 어떠한 부담도 주고 싶지 않다. 그런 어려운 배려를 할 수 있는 아이도 아니고. 그래서 청문은 조금 가벼운 진심을 꺼내들었다.

 

“너는 새 사람을 만나는 것을 유독 싫어하니까.”

 

“엥? 제가요?”

 

“상인이나 점소이와 면을 트는 것 외에 말이다, 인석아.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퍽 기꺼운 일이란다.”

 

“저는 사형만 있으면 되는데요. 가끔은 못난 사제도 끼워주겠지만.”

 

“이러니까 하는 말이지. 신부가... 아니, 아직 아니지. 그 아이가 오면 너무 의식하지 말고 그냥 친구 대하듯 해보렴. 어쩌면 죽이 맞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니.”

 

“흠....”

 

청명은 허공을 빠안 보다가 대답했다.

 

“네.”

 

 

 

 

 

신부는 도둑처럼 찾아왔다. 화려한 행렬도, 예를 차린 인사도 없이. 야음을 틈타 던져진 보따리처럼 담 안에 털퍽 놓여 있었다. 덮어쓴 붉은 면사는 햇빛이라도 한 번 쐬이면 바래 버릴 것처럼 고왔지만 그뿐이었다. 아이는 처량하게 주저앉은 모습이었다. 입엣말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언뜻 듣기로 비속어 같기에 청문은 모르는 척 해 주었다. 무슨 말을 듣고 여기에 왔기에 이렇게 속이 상했을까. 게다가 청명의 가슴팍에 올 것 같은 조그만 아이였다. 하긴 청명보다 다섯 살쯤 어리다면 아직 덜 컸을 나이다.

 

“일어나렴.”

 

“.......”

 

크응, 하고 조그맣게 코 먹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찬 데에 앉아 있으면 몸을 상한단다. 이제 막 계년(여자가 처음 비녀를 꽂던 나이. 보통 15세.)을 지났다고 들었다. 그럼 다 큰 아가씨인데 바닥에서 그러면 안 되지.”

 

“아뇨, 저는 지학(논어에 공자가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 데서 유래. 15세)을....”

 

아이는 대꾸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말을 기다려 봐도 다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청문은 부드럽게 손을 들어 집을 가리켰다.

 

“들어가겠니?”

 

“...일부러 이렇게 외딴 곳으로 데려온 건가요?”

 

경계와 두려움이 스민 목소리였다. 청문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돌아보았다. 화산 중앙의 멋들어진 전각들에 비하면 소박하고, 거리도 많이 떨어져 있는지라 조용하긴 하다. 요전번 청명이 걷어찬 벽이 움푹 패어 있는 것도 보였다. 초대하기 전에 수리를 할 걸 그랬나.

 

“원래 여기서 산단다.”

 

“이런 데서?”

 

이래 봬도 무너지면 세우고 무너지면 세우면서 정성 들여 가꾼 집인데 너무하네. 청명이 어릴 때는 힘조절을 못 해서 아침에 세워 놓으면 오후쯤 부숴먹고 밤에는 널빤지나 댄 채 자야 한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무척 번듯하다 하겠다. 그러나 사천의 패자, 사천당가의 품에서 자라던 아이라면 그렇게 느낄 법도 했다. 이 정도면 마굿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겠지.

 

“도가에서는 사치를 멀리 하고 심신을 수양할 것을 권장하니까. 그래도 외풍 들지 않고 따뜻한 집이니 너무 걱정 말거라. 방은 따로 분리되어 있으니 긴장할 거 없다. 네가 그... 찾아온 아이는 옆 방에서 잘 거야. 내가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말썽을 부리진 않겠지.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인사하러 오마.”

 

붉은 천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소매 아래 주먹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보였다. 아이는 그대로 가만히 서 있다가 팩 돌아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지간히 불안하겠지, 그런 생각에 그저 안쓰러웠다. 청문은 아이가 사부작거리는 것을 잠시 지켜보았다. 애 둘만 두고 나가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로 시끄러워져봤자 과년한 처자에게 좋을 일 없으니 객청을 쓰지 말고 조용히 넘기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냉큼 청명과 이 가옥을 던져주고 달아나던 백오를 생각하면 속이 꿈틀했다. 아직 정해진 것도 없는데 신방이니 뭐니 운운하며 필히 새 거처를 찾아야 한다 주장하던 얼굴은 벙긋벙긋 웃고 있었지. 뭐가 그리 좋을까, 내일 스승님 밥상에 반찬은 쓰고 짜게 해서 올려야겠다. 청문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청명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물론 저 벽 너머에서 누군가들이 쑥덕거리는 것은 느껴졌다. 며칠 옆방에서 지내며 몇 마디 말 섞어나 보라는 권유가 입에 깔깔했다. 장가라니, 내 참. 덜떨어진 사숙들이나 입성 살펴 줄 재주가 없어 처를 들이는 거지 청명에게는 그런 것 필요도 없었다. 사형이 못내 신경쓰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수락했지만, 장단이나 좀 맞춰 주다가 내쫓아야지. 청명은 재차 다짐하며 돌아누웠다.

 

쾅!

 

“엥?”

 

밖의 찬 공기가 먼저 뺨을 스쳤다. 다시 콩, 하고 문 닫는 소리가 났다. 곧 어둠 속에서 누군가 사박사박 걸어왔다. 버선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다. 어째 걸음걸이가 질질 끌렸다. 그러고는 침상에 풀썩, 가벼운 무게가 실렸다.

 

“뭐, 뭐야.”

 

“너야말로 뭐야.”

 

이 쥐콩만한 게 반말을? 청명은 계획을 수정할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며칠이나 장단 맞출 것 없이 지금 한 대 패서 내보내면 될 것 같은데. 보름달이 밝아 덧창을 닫았더니, 방 안은 새카매서 보이는 것 하나 없다. 어둠 속이라고 청명의 기감으로 이런 애송이 하나 못 잡아낼 일도 없지만.

 

“야. 네 방으로 안 가?”

 

“여기도 내 방이야.”

 

“미쳤나, 이게.”

 

“왜? 신방이잖아. 내가 못 쓸 게 뭐 있어?”

 

“아니라고. 여기 내 방이라고.”

 

“이럴 거면 왜 사람을 이 멀리까지 부른 거야? 사천에서 오는 데 며칠이나 걸렸는지 알아?”

 

“내가 불렀겠냐? 어른들이 지들 멋대로 결정한 거지. 넌 뭐 네가 오고 싶어서 왔어?”

 

애송이는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조용하다가, 재차 목소리를 세웠다.

 

“암만 그래도, 첫 만남인데 신랑 될 사람이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게 어디 예의야? 섬서는 혼례를 이렇게 치뤄? 당사자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뭔 소리야? 나 신랑 안 해.”

 

“...왜?”

 

“얼굴도 모르는 애랑 어떻게 사냐? 애초에 그래서 이런 유예를 마련한 거 아냐? 사형이 그랬는데. 아니, 얘 성격 이상하네. 보통은 정략혼 같은 건 싫어서 울고짜고 하지 않나? 어디 겁도 없이 남의 침상엘 올라와, 올라오긴. 너 못 배웠어?”

 

“잘 배웠거든?!”

 

“그럼 뭐야? 나 방중술 같은 거 안 배웠어.”

 

“뭐, 뭔 소리야!”

 

“어, 아니냐? 난 또 아주 발랑까진 애인가 했지.”

 

씩씩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굴 앞으로 뭐가 쑥 내밀어진 기척이 나는데, 예기가 없는 걸로 봐서는 아마 손가락질이지 싶었다. 어린애가 건방지네.

 

“동침하기 전에 인사라도 시키자고 했다는 건 뭐 합리적이라 할게. 사실 파격적이라 불러야겠지만 우리 집에서도 일은 조용히 진행하고 싶어했다니까. 하지만 사주단자 한 번 오가지 않고, 집안에 혼수 하나 안 오고. 형식적이라도 지켜야 할 게 있지 않아?”

 

“아니, 혼사 자체가 아직 결정된 게 아니라고. 너 사람 말 듣고 있냐?”

 

“왜?”

 

짧은 질문인데도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청명은 그 안에서 까탈스러움 너머 만져지는 감정을 느꼈다. 불안이 뾰족했다.

 

“결정된 게 아니면, 뭔데? 반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도 내가 쓸모없다고 하려고? 내가 무슨 ? 이리 치우면 이리 가고 저리 치우면 저리 가게?”

 

어, 소매를 잡혔다. 쥐고 짤짤 흔드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대단치 않은 힘이라고 거슬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힘이 아주 약하지도 않다. 대놓고 시비를 거는데, 청명은 그만 삐죽해지고 말았다. 사형은 대체 왜 날 그리 잡도리한 거지? 언성을 함부로 높이면 안 된다, 상대를 지레짐작해 평가하면 안 된다, 주먹을 들어도 안 되고 물론 발을 드는 건 더 안 된다, 아주 구절구절 늘어놓았는데. 정작 만나 보니 마구 쏘아붙이며 손을 대는 건 저쪽이 먼저 아닌가. 이러면 그 뭐냐, 정당방위 아니야? 패도 되지 않나? 많이도 아니고, 딱 한 대만....

 

“왜 대답을 안 해? 너도 나 무시해?”

 

청명은 들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끌어내렸다. 저 혼자 열받아선 거칠어진 숨 사이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코 먹는 어린애랑 대거리하는 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너 말이다.”

 

“뭐?”

 

“이럴 거면 차라리 때려라. 이게 뭐하는 짓이냐? 덤비진 않고 이상한 떼를 쓰고.”

 

“그게-”

 

청명은 가볍게 혈을 짚어 녀석을 재웠다. 그리고 옆으로 쓰러진 몸을 집어들었다. 체구가 작으니 물론 가볍지만, 자수나 놓았을 사람치고는 묵직했다. 허리를 받쳐 드니 마치 오랫동안 무학을 닦은 아이처럼 근육이 느껴졌다.

 

“...뭐야?”

 

물론 이 애가 뭔 수련을 했든 남의 일이다. 청명은 생각을 집어치우고 ‘신부’를 옆 방으로 옮겼다. 침상에 던져놓긴 했으니 입 돌아가진 않겠지.

 

 

 

 

 

“...그 사람 대체 뭐죠!”

 

아. 벌써 대거리라도 했나. 청문은 숙수가 차려준 밥상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 애가 무례하게 굴었니?”

 

“네!”

 

머리 곱게 묶어내린 아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소매를 부러 고쳐 쥐고, 아이는 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상 위의 찬들은 슴슴한 산채요리가 다수였다. 청문은 내심 걱정스러웠다. 머리 올릴 나이야 되었대도 한창 자랄 때인데, 식탁에 고기도 없고 향신료도 적어서 입에 맞지 않을 테다. 하지만 아이는 조용히 오물오물 밥을 씹었다. 불평불만 없이 예의 바른 모습을 보니 감동적이었다. 왜 도가의 아이가 이렇게 크지 못한 걸까? 자신의 교육에 문제가 있었나? 청문이 그렇게 자문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했다. 청명이 이놈, 뭘 한 거지? 청명은 손이든 발이든 우선 얼굴에 갖다 박는 놈인데, 아이 얼굴에 멍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옷에 가려지는 데를 노려 때리는 성품은 아니라 그럼 때린 것은 아닐 테다. 그렇게 가만 살펴보니 이 아이는 과연 사천 출신의 아가씨라, 머리카락은 까맣고 반질반질한데다 피부가 옥처럼 희었다. 매양 절벽에서 수련하느라 그늘도 없이 탄 청명과 무척 대비되었다. 그런 산도둑 같은 놈에게 시집오기엔 아까웠다.

 

“혹시 못된 말이라도 들은 거야?”

 

“그랬으면 나았게요. 제가 말을 걸었는데 대꾸도 제대로 않더라고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냅다 혈을 짚어서 내쫓다니. 그게 무슨 예의에요!”

 

혈자리는 우선 기를 둘러 보호하게 되는지라 딱히 효과를 볼 일이 없는데, 아직 어려 미숙했던 것일까. 그래도 통했으니 다행이다. 때려서 기절시키지는 않았으니 됐어. 그러면 청명치고는 굉장히 예의를 차린 편이다. 청문은 이따 청명에게 전병을 좀 가져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어 물었다.

 

“아침부터?”

 

“간밤에요!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싶어서 찾아갔더니 무슨 말도 없고 멀뚱멀뚱.”

 

“아니, 조심하라고 방도 비워줬는데.”

 

“제가 못 갈 데 간 것도 아니잖아요?”

 

이 아가씨도 보통이 아니네. 과연 집안 어른들의 골머리를 썩일 만 했다. 물론 청명의 패악질에 익숙해져 있는 청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도 자는 사람을 깨우면 반응이 늦되기 쉬우니까, 너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흥. 전혀 안 자고 있었어요. 눈이 밤짐승처럼 번쩍이던데.”

 

아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차를 홀짝였다.

 

“한소리 해주려고 정신이 들자마자 일어났는데 벌써 없었어요.”

 

그러다가는 번뜩 눈을 들었다. 순간이지만 살기까지 번뜩였다.

 

“설마 밤마실 다니는 건 아니겠죠? 그런 신랑은 못 둬요. 그건 당가도 무시하는 거에요!”

 

“아냐. 수련하러 갔을 거다. 일찍부터 수련하러 가는 건 원래 그 애의 습관이라.”

 

찻물이 튀었다. 어깨를 덜컥한 아이가 뻣뻣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방금의 말에 당황할 요소가 있었나? 청문이 되짚어보는 동안 아이는 소매를 바투 말아쥐며 주먹을 꼭 쥐었다. 간밤엔 미처 몰랐는데, 손가락 끝이 거뭇거뭇했다. 이런 여아에게까지 독을 만지게 했나? 하긴, 이래봬도 직계라 하니 어느 정도 독의 내성은 기르게 했을 수 있겠다. 청문은 의아함을 미뤄두고 자세를 바로했다.

 

“아보. 그리 불러도 되겠느냐?”

 

“......그냥 보로 괜찮아요. 왜요?”

 

“가문의 일이 소중하다니 기특한 마음이 들어 그런다. 만약 정말 입적하게 된다면 우리도 그리 중히 여겨줄까 싶어서.”

 

“아직은 모르죠.”

 

아이는 새침하게 돌아앉았다. 기죽은 듯 쳐져 있어 몰랐는데 보기보다 어깨가 있고 체격이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건강하면 좋다는 주의인지라 청문은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건강하기만 한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마냥 그럴 순 없었다. 가문도, 가문 내에서의 위치도. 사천당문의 보. 집안에서 치울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덜렁 보내진, 잘 배운 태가 나는 직계의 아이.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당문에 저만한 직계 여아는 없었는지라 청문은 자못 마음이 쓰였다.

 

“왜 당신이 신경쓰죠?”

 

“음?”

 

“간밤에 맞아 준 것도 그렇고, 지금도. 감시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가문에서 신경 쓸 일도 없고, 저도.... 뭘 하려는 마음도 없으니까. 제가 어디로 보내지는지도 모르고 왔는걸.”

 

“어, 몰랐니?”

 

“어른들이야 알았겠죠. 저는 못 들었어요.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만이라도 알았으면 했는데. 세상에 함도 안 보내, 혼수도 안 보내, 아무 정보가 없을 줄이야. 그게 분해서 좀 따졌더니 듣지도 않고.”

 

“저런. 우리는 배려한다고 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적은 게 좋다고 하여-”

 

“알아요. 화낸 거 아니에요. 그냥, 이젠 안 궁금해요. 살게 되면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여기서도 안 받아주면... 다신 볼 일 없을 텐데 알아서 뭐 해. 안 들을래요.”

 

부루퉁한 얼굴. 당연하게도 상처받은 것이다. 세계에, 그녀를, 그를 내친 세계에. 청문은 일부러 조금 가까이 고쳐 앉으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맞춰 보렴. 어디인 것 같니?”

 

“화산 아니면 종남이겠죠. 무당은 혼인을 안 하니.”

 

“어떻게 알았지?”

 

“기운이 맑아서 알았죠.”

 

“난 그냥 반찬이 맛없어서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있고.”

 

보가 피식 웃었다.

 

“그만두세요. 그렇게 살피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뭘 이런 사람 비위까지 맞추려 들어요?”

 

“그야 우리 애가 어지간히 문제아라서.”

 

“예?”

 

청문은 선선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 쪽에서 마음에 안 들까 걱정했거든. 예상대로 된 것 같지만.... 그 애는 예의 같은 걸 차릴 줄 모르지. 언행도 험하고. 그래도 알고 보면 못된 애는 아니야. 물론 네가 참아 줄 이유는 없지만, 보야. 며칠 쉬어간다 생각하고 너무 날 세우진 말렴.”

 

“며칠만요?”

 

“글쎄, 너도 그 애도 마음이 맞으면 여기 남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 맞지 않는대도, 네가 돌아가기 싫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고.”

 

“돌아....”

 

보는 혀끝을 찔린 듯이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복잡하겠구나, 하는 기분에 청문은 짐짓 눈치 없는 척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때리지 않은 걸 보면 네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인데.”

 

“예? 무인은 원래 양민 때리면 안 되잖아요.”

 

“...음, 어떤 사람은 성정이 자유분방하기도 하단다....”

 

“아....”

 

아이는 어이가 없는 듯 외마디를 흘리고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한동안 조용히 턱을 괴고 있었다. 일다경쯤 사색에 잠긴 끝에 당보는 중얼거렸다.

 

“진짜 때려도 되나?”

 

“음?”

 

“아뇨, 아니에요.”

 

 

 

 

 

청명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청문 사형도, 청진이 놈도 없는 집이라고 생각하니 어째 허전했다. 아무도 없을 때처럼 술 먹고 뻗어 잘 수 없다는 게 큰 이유일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귀찮게 구는 인간들 좀 없다고 기분이 쳐질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기분이 쳐지든 말든 일과는 늘 같았다. 새벽부터 수련하고, 중간에 잠시 화음에 내려가 목 좀 적셔 주고, 저녁엔 다시 올라와 밤이 깊을 때까지 수련했다. 무인의 장점 중 하나는 잠을 덜 자도 된다는 것이라 청명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나태한 짓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나태할 시간이 있으면 술을 마시지 왜 늘어진단 말인가? 건방진 손님은 자는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 귀찮게 굴면 서안까지 가서 외박할 테다. 청명은 구시렁거리며 제 방의 문을 열었다.

 

끼익.

 

“어?”

 

미닫이가 미끄러지며 무언가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걸릴 게 없는데? 뭐지? 싸한 느낌에 급히 안력을 돋궜다. 즉시 머리 옆으로 뭔가 날아와 고개를 틀었다. 귀 옆으로 바람이 불었다. 돌아보니 바닥에 대침 세 개가 박혀 있다. 희미한 독향이 났다.

 

“미친....”

 

보통 사람이라면 주저앉았을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돌아나갔을 것이다. 청명은 방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시야의 사각에서 예기가 느껴졌다. 바닥을 밟으니 받침이 부러지며 독연이 피어올랐고, 옷장 틈새에 끼워두었는지 몇 개의 비침이 날아들었다. 한동안 카랑카랑 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마지막은 비도였다. 복도 하나 건너 있는 방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날아든, 우스울 정도로 정직한 대신 꽤나 빠른 비도. 청명은 한동안 그대로 서서 남은 수작이 없나 살피다가 천천히 납검했다. 그리고 미닫이문에 걸린 것을 뜯어 창을 열었다. 달빛에 비친 것은 무척 가늘고 질긴 실이었다. 꼼꼼하게 재를 묻혀 색까지 죽인. 이 추위에 불을 쬐는 대신 화로를 뒤엎었단 말인가. 청명은 그대로 옆 방으로 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요했다. 손님이 온다고 단장을 했는지 평소보다도 깨끗하고 은은하게 좋은 향이 났다. 그러나 청명은 그런 데에 눈을 뺐기지 않았다. 마루 아래, 어떻게 한 건지 그 아래에서 발발 떠는 기색이 느껴졌다. 청명은 픽 웃었다. 코끝에 닿는 독 덕분에 기분 좋게 졸리기 시작했다.

 

“수면독이라. 잠 좀 재운 게 그렇게 분했나?”

 

어제는 안 팼지? 오늘은 팰 거야. 딱 한 대로 깔끔하게 재워 주마. 청명은 마룻바닥에 구멍을 낸 다음 만족스럽게 말했다.

 

“너 내가 봐줬다.”

 

 

 

 

 

“사형, 사형! 걔 대체 뭐에요?!”

 

청문은 눈을 비볐다. 찬바람이 끼쳐 뭔가 했더니, 이런 말로 잠을 깨다니. 정말 하루하루 난리다. 간밤에는 청명 쪽이 화가 난 건가. 청문은 이렇게 계속 싸우면 두 아이를 떼어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눈이 크게 뜨였다.

 

“어디서 왔다 그랬지? 아, 안 가르쳐 준댔죠? 근데 알면 안 되나? 뭐 하다 온 애래요?”

 

약관이 된 녀석이 아이처럼 눈이 반짝반짝, 뺨도 붉었다. 걸음걸이서부터 신난 태가 났다. 대충 묶어 올린 머리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청문은 창에 매달린 아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완전 재밌었어요!”

 

“문으로 좀 다녀라. 의자 줄까?”

 

“아뇨, 금방 수련하러 갈 거에요. 근데 걔 뭐에요? 미쳤던데?”

 

미쳤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쓰인 말인가, 부정적으로 쓰인 말인가....

 

“근데 사형, 저 걔한테 뭐 좀 줘도 돼요?”

 

“못 먹을 거 주고 그러면 안 된다. 못된 장난 치지 말고, 술도 안 되고....”

 

“그런 거 말고. 비침을 잘 던지던데 차림을 보니까 더 있을 거 같지가 않아서 그래요. 뭐 대나무라도 몇 개 던져 놓으면 알아서 깎아 쓰겠던데? 아, 참. 실도. 가죽끈 같은 것도 쓰려나? 쓰겠죠? 걔가 손재주가 좋아.”

 

“청명아. 무슨 짓들을 한 거냐?”

 

“제가 뭘 해요. 전 당한 쪽인데요? 아무튼 그래도 되죠? 그거는 뭐 나쁜 짓 아니죠? 챙겨주는 거니까?”

 

“어, 어어.... 그래.”

 

청명은 히힛 웃고는 다시 창 밖으로 튀어나갔다. 청문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절레절레 고개저었다.

 

 

 

“...거기 아가씨, 뭐 합니까?”

 

청문은 미간을 짚었다. 청명이 이상한 짓을 하고 나서 겨우 한 시진 지났는데.

 

“거기는 의약당인데, 아픈 데가 있니?”

 

뜨끔한 뒷모습이 주춤주춤 멀어졌다. 머리는 퍽 단정히 올렸지만 어설프게 도복을 입은 꼴이 우스웠다. 청명의 옷장을 뒤졌나본데, 품이 아직 한참 남아 볼품없어 보였다. 청문이 그 뒷덜미를 잡아채자 결국 시인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니요. 아픈 데는 없는데.”

 

“워낙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눈에는 안 띄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아직 결정된 사안이 아니니까- 응?”

 

청문은 당보의 품이 한아름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은은한 약내가 났다.

 

“...정말 아픈 데 없어?”

 

“없어요.”

 

당보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뺏길까 봐 옷섶을 꼬옥 여몄다.

 

“이건 그냥, 약은 잘 쓰면 독도 되니까.”

 

독도 잘 쓰면 약이 되는 게 아니라? 청문은 머리가 아찔했지만 일단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다 필요해서 마련해 둔 약재인데 그렇게 빼 가면 안 된단다.”

 

“값은 치렀어요. 훔친 거 아니에요. 저 패물 가져온 거 있어서 안에 놓고 왔는데.”

 

“그래도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면 문제가 된다. 패물도 값을 따져서 팔아치우기까지 품이 들어. 뭘 얼마나 챙겼니?”

 

당보는 주저주저하며 제 품에 밀어넣은 약재의 종류를 읊었다. 과연 당가의 아이답게 마른 약재의 무게까지 딱딱 기억하는 것이 신기했다. 청문은 머릿속에 그것들을 갈무리해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장부에 올려두겠다. 그렇게만 하면 괜찮아.”

 

“진짜로요?”

 

“있는 줄 알았는데 없는 게 문제지, 서류에 남기만 하면 괜찮아. 그렇다고 전부 긁어다 쓰진 말고. 혹시 또 약재가 필요해지면 내게 말을 해주렴.”

 

“네에.... 그럼, 저기.”

 

“응?”

 

“잘 쪼개지는 나무 같은 게 있을까요? 마르고 곧은 목재 같은 걸.... 좀 쓸 데가 있어서.”

 

청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라면 찾지 않아도 그 집에 도착해 있을 게다.”

 

 

 

 

 

청명은 검을 쓱 빼들었다. 긴장이 등을 쭉 펴게 했다. 제 집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 이것은 이미 제 집이라고 하기 어렵다. 적이 무언가 수를 써 둔 요새지. 물론 어린애 장난 같은 수작이니 다치진 않겠지만. 살기가 없다고 재미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놀이라도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아무튼 어제는 참신했다. 비동이라는 건 말로만 들었지 아직 들어가 본 일이 없는데, 꼭 그 비동에 뛰어든 것 같았다. 하나를 밟으면 연쇄적으로 뭐가 툭툭 하더니 뭐가 쏘아지질 않나, 보이지도 않는데 발에 뭐가 걸리더니 매듭이 다리를 당기질 않나, 뻔히 보이는 검로보다 흥미로웠다. 물론 죄다 약해빠지긴 했지만, 발상이 좋다 이거다. 지금 이 집은 하루종일 뭘 했는지 약재 달인 냄새로 가득하고, 마당에 쌓아 둔 대나무는 자투리 조각만 조금 남긴 채 죄다 사라져 있었다. 영 못 쓸 애송이가 왔다 했더니 패기는 좋잖아. 놀아줄 준비는 된 거겠지? 청명은 씨익 웃으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아아아악!”

 

당보는 베개를 쥐어뜯었다. 뒷통수가 얼얼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제 맞은 자리를 어제 또 맞았더니 머리가 욱씬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벌써 며칠 째 이게 무슨 짓이람. 분에 못 이긴 거뭇거뭇한 손가락이 천을 북 뜯었다. 솜이 풀풀 날렸다. 그놈을 꼬집어준다고 생각하고 손가락에 힘을 빡빡 주었다. 어차피 망가진 김에 베개를 아주 못 쓰게 만들었지만 기분이 풀리진 않았다. 그 새끼 대체 뭐지? 뭘 먹고 자라서 그렇게 튼튼한 거야? 진통제를 하루종일 졸이고 졸여서 쓸만한 마비약이 될 때까지 공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아? 그걸 된통 처먹고도 어떻게 펄펄 날아다니지? 졸려서 빨리 끝내야겠다, 그런 말을 했던 걸 보면 아주 안 통하지는 않는 모양인데. 그냥 멧돼지 같은 건가? 집토끼한테는 통할 양의 독도 산돼지에게는 세 배는 써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당보는 머릿속에서 그것의 체력을 기존보다 더 높이 수정했다. 더 써야 돼. 독을 아주그냥 치사량을 먹인다 생각하고 써야 돼. 재우기만 해도 이기는 거다. 적어도 그 머리에 꿀밤 한 번은 놔 줄 수 있을 테니까. 당보는 이를 득득 갈다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못 봤네.”

 

놈은 밤이 깊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매번 한바탕 칼춤을 추고 당보를 재워버린다. 당보가 겨우 깨어 보면 아침해는 이미 떠 있고, 조반상과 각종 약재와 갖은 나무토막 및 쓸만한 손칼 몇 개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어디 더 해 보라고 등을 떠미는 격이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고 그 대사형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따져 봤지만,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둘이 잘 노는 거 같아서 다행이라고 할 뿐이었다. 이게 노는 걸로 보여?! 나는 이제 살초를 고려해야 할 지경이라고! 당보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나 생각했다. 그냥 분했다. 자기는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른다고 멀뚱멀뚱 대꾸하던 그 꼴에 열이 받았다. 상처받은 만큼 상처주고 싶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발리는 거 말고! 아무리 이 나잇대에 대엿 살 차이가 크다지만, 내가 수련을 못한 지 좀 되었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윽....”

 

수련하고 싶다. 땀이 눈에 들어가 따끔거리고, 옷 안에서 소금기가 버석거리는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 이런 수작질이 아니라 온몸으로 덤벼서 부딪치고 싶다. 그렇게 해서 깨진다면 차라리 속이 후련할 텐데. 이깟 임시방편으로 쥐어짜낸 약 말고, 카랑카랑 병 소리가 울리던 달콤한 독들. 정해진 곳을 톡 눌러 당기면 쏘아지던 섬세한 암기들. 빼앗긴 것들. 짧아진 소매. 당보는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마음을 접으라고 몇 번이나 말을 들었던가. 갇히고 매맞으면서도 버려지지 않는 마음을 어찌 하란 말인가. 시집이나 가라고 내쫓겼을 때는, 보쌈당하듯 들려 던져졌을 때는 정말 끝인 줄 알았다. 끝이리라 생각했다. 다시는 적을 상정하여 투로를 고민할 일이 없을 거라고, 아무도 내가 무인인지조차 모르는 세계에 떨어져 시들고 말 거라고....

 

“짜증나.”

 

그러나 그, 어둠 속의 남자는 당보를 똑바로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짓 말고 덤벼라. 그렇게 말해준 것 같았다. 물론 훨씬 교양 없는 태도긴 했지만. 당보는 짧아진 소매를 다시 쓰다듬었다. 아쉬웠다. 익숙한 부피도, 늘어지던 무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공간이 확장된 감각이 아쉽다. 쓸 수 있는 수가 늘어나면 세상은 훅 넓어졌다. 암기는 복잡한 선으로, 독연은 무수한 점으로 공간을 삼켰다. 그것을 빼앗긴 지금 그는 마치 팔을 잃은 검수 같았다. 아아, 암기도 독도 쓸 수 없으면 무엇으로 적과 싸워야 하지. 차라리 손에 분명히 잡히는 날붙이가 있으면 나을지도 몰라. 당보는 손끝을 씹었다. 그 자식, 반드시 한 방 먹여준다. 그러고야 말겠어. 그리고 당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걸음을 질질 끌며 다시 조악한 기관진식을 깎으러 갔다.

 

 

 

 

 

“이쯤되면 그냥 혼서를 넣을까?”

 

놀랍게도 이것은 청문의 말이었다. 벌써 보름째 왁다글닥다글 잘 지내고 있으니 진심으로 묻는 것이다. 청명은 사람을 영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 별 계기 없이 마주치는 이와는 오히려 친근하게 지냈다. 반대로 마음에 둔 이와는 꼭 마찰을 일으켰고, 그 기간을 통과하고 나면 상대를 놓아주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청진이가 아직도 목줄 잡혀 사는 것 아닌가. 당가 신부를 맞았더니 중독되어 큰일을 치뤘다, 그런 말은 흔한 무림의 소문이다. 썩 좋은 일은 아니나 실제로 한둘쯤 일어나도 놀라운 사건은 아니다. 새신부가 매일 약을 한바가지 졸여서 밤마다 쏟아붓는다고 해도 청명이 나가서 사고치는 대신 반짝반짝 웃고 다니니 충분히 감수할 일이었다. 당가에서 질색하는 유언비어가 되리라는 것은 알지만, 청문의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니었다. 내 새끼가 좋다는데 남의 집에서 뭐라든 무슨 상관인가? 어린애를 주눅들게 해 내쫓는 집에는 그 정도 신경을 써 줄 가치도 없었다. 게다가 약을 짜서 만든 독에 당해줄 놈이었으면 화산이 그 고생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한번쯤 당해 보면 성질이 좀 나아지련만.

 

“너, 그 애 꽤 마음에 들잖아.”

 

청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청문은 그것을 대답으로 간주했다. 좋다, 좋아. 약관이면 사가에서는 장가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도산검림에서는 이립쯤 되어야 이리저리 혼처를 찾아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좀 일러도 나쁘진 않겠지. 청명의 마음에 새로 사람이 자리잡는다면 좋다. 이 벽 높고 고고한 천재의 곁에 사람을 하나라도 더 붙여 주고 싶은 것이 청문의 솔직한 마음이라, 그는 지금 조급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청명이 불쑥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들어요. 드는데, 그러니까....”

 

청명이 골똘히 턱을 괸다. 그 눈이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어둠 속에서 건드린 선을 회상한다. 들어다 옮길 때마다 잡히던 가벼운 몸. 그리고 무엇보다 문앞에 선 사람의 투로가 어찌 나아갈지 수천 번 고민해본 흔적이 묻어나던 기관진식들.

 

“좀 더 지켜보죠.”

 

“왜? 나는 네가 더 급하게 굴 줄 알았는데.”

 

“뭔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뭔가?”

 

청명은 끙끙거리며 입술을 씹었다. 감각을 말로 바꾸어내는 것은 청명이 늘 어려워하는 일이다. 무학과 검로에 있어서는 빼어난 녀석이, 마음과 관계의 문제가 되면 문장 하나 완성시키기도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청명은 애써 말을 짜냈다.

 

“걔가....”

 

“응.”

 

“원하는 게 그게 아니라는 느낌이.”

 

청명이 청문을 돌아보았다.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어요.”

 

 

 

 

 

청명은 길게 하품했다. 피로가 쌓일 일상은 아니지만, 역시 암만 수면독이래도 매일 집어먹으면 몸상태에 별로 안 좋은가? 아니면 괜한 고민을 하느라 안 쓰던 머리를 써서 그런가. 아무래도 머리를 맑게 하는 데에 가장 좋은 것은 검로를 깨끗이 긋는 일이라, 청명은 저녁 내내 복잡한 환검 대신 선인지로를 그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다시 마음이 산란했다. 그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직도 그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은 걸까? 그게 좋은 일인가? 나는 좋은데....

 

“에이.”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엉킨 것처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 문제는 귀찮았다. 이쪽 아니면 저쪽, 이런 게 편한데. 청명은 에휴 한숨쉬며 대문을 넘었다. 기어이 마당까지 뻗친 기관이 청명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이건 검으로 쳐내 주고, 다리 쪽으로 오는 건 각반 부분으로 걷어찼다.

 

“오늘은 어디까지 했으려나.”

 

매일매일 하루만에 이렇게나 부지런하게 구는 것도 재주다, 재주. 하여간 청명은 근면한 이를 좋아했다. 부려먹기 좋기도 하고, 이렇게 놀아주기도 하지 않는가. 물론 제 집이 아니었더라면 이따위 장난질, 진작에 한 번의 검기로 통째 부쉈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것도 싸움에는 필요한 일이니까....

 

“음?”

 

청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난리도 아닌 상황이라, 이상했다. 이러면 방 안에 쓸 게 없을 텐데, 어둡고 사각도 많은 곳을 두고 뭐하러 달 밝은 마당에 이리 기관을 몰아넣었지. 어쭈, 지금 건 제법 암기 같았다. 이 연기는 또 어떻게 피운 거지? 이런 걸 만드는 데 쓸 재료가 화산에 있긴 했나? 청명은 이리저리 수를 세어 보며 겅중겅중 걸었다. 그리고 문앞에 서서 겨우 깨달았다.

 

그 애가, 기다리고 있다.

 

청명은 입가를 만졌다. 뭐가 당긴다 했더니 내가 웃고 있었구나. 하지만 정말 개운했다. 속이 시원스러웠다. 늘 그랬듯 제 몫의 방에 숨어 있지 않다. 결국 찾아내 쓰러뜨릴 때까지 가만히 떨고 있지 않는다. 그 아이는 어둠 속에 도사려, 청명의 방에 있었다. 갖은 기관은 마당에서 다 쓴 것인지 고요했다. 방을 향해 걸어갈수록 따끔따끔하게 투지가 피부를 찔렀다. 겨우 지학이라는 아이가, 독기가 있어 좋단 말이야. 우리 명자 배 놈들은 몇 대 맞고 나면 사숙 무섭다고 엉엉 울기나 하는데. 거기 떡 내놓고 본받으라고 다그치고 싶다. 이렇게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더듬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나 왔다.”

 

소리는 없었지만 기척은 더욱 예리해졌다. 나름대로 숨겨보려 애쓴 것인지 한계까지 낮아진 숨과, 아마도 빼들었을 날붙이가 기감에 잡혔다. 이렇게 가슴이 뿌듯한 것을 뭐라고 부르지? 청명은 아직 모르는 말이었다. 그리고 청명은 늘 말보다 몸이 더 빨랐다. 칼이 문을 호쾌하게 가르고 들어갔다. 수리는 내일 하면 되지, 뭐!

 

“오.”

 

새카맣던 방 안은 마치 밤하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온갖 날붙이가 달빛을 반사해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자루가 짧고 날도 짧은, 곡도에 막칼에 조각칼과 끌까지 우글우글했다. 아니, 내가 이렇게 많은 칼을 줬던가? 아니면 어디서 훔친 건가? 어, 식칼도 있는 거 보니까 그런 거 같다. 청명은 멍청히 생각함과 동시에 검을 흩뿌렸다. 눈앞에 선 아이에게 닿으려면 날아드는 도를 모두 쳐 낸 뒤여야 했다. 카랑, 카랑하고 검이 허공을 그었다. 아이는 품에서 자꾸만 새 도를 꺼내들었다. 쪽수만 많다고 해결될 것 같으냐, 마당에 뿌려 둔 것도 내 체력을 갉아먹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비웃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며칠을 내리 패배해도 포기하지 않는 근성, 끊임없이 새 수를 찾아내는 발상, 무엇보다 결국 정면에서 맞부딪쳐 오는 저 기백이 좋았다. 아, 좋다. 이런 기분을 전에 느껴 본 적이 있던가? 사방에서 날아드는 도가 달콤하게 빛을 흩뿌린다.

 

“젠장!”

 

그래, 방금 쳐낸 게 마지막이구나. 청명은 가볍게 납검했다. 지금은 오히려 몸이 가뿐했다. 독을 거의 안 먹어서 그런가? 역시 독무는 방안에 설치하는 게 나았겠다. 밀폐된 공간이라는 이점을 쓰지 않다니 아쉬운 짓이다. 독액 묻힌 바늘 따위가 내게 상처를 내기를 바라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텐데. 하지만 그건 모두 지난 보름간 죄다 쓴 수였지. 안 통할 줄 알면서 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는 녀석은, 좋다. 무엇보다 이렇게 또렷한 정신으로 마주볼 수 있잖아.

 

“안녕.”

 

창을 열어 두었는데도 방이 새까맣다. 그믐날은 별이 눈에 띄지. 네가 던진 도들은 날이 번쩍번쩍해서 꼭 별 같더라. 마구잡이로 던졌다면 시시했을 텐데, 하나하나 나름대로 계산을 넣어서 재미있었어. 청명은 히죽 웃었다. 달 없는 밤의 어둠 속에 지학, 혹은 계년의 아이가 서 있다.

 

“나 기다렸어?”

 

“응.”

 

방금의 일로 지쳐버렸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빡쳐서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청명은 히죽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좋아, 좋아.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까짓 거 덜 아프게 재워주-

 

사삭!

 

“오.”

 

끊어진 머리카락이 날렸다. 잔뜩 긴장해서, 청명이 다가올 마지막 순간까지 도사려서, 최선을 다해 날린 일격이었다. 청명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수라는 생각은 안 드냐?”

 

무섭게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서 더 도망쳐서 어쩌자고....”

 

“그것도 그런가.”

 

청명은 털썩 앉았다. 다 이긴 사람이 마지막 일격을 날리지 않자, 마주한 데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청명은 양반다리를 해 앉고는 너도 앉으라 손짓했다.

 

“야, 너 뭐 하나만 묻자.”

 

“뭐, 뭔데.”

 

“너, 내 아내가 되고 싶냐?”

 

“약올려?”

 

“묻잖아. 대답을 하라고.”

 

“.......”

 

“좋은지 싫은지를 물은 게 아니고, 어떻게 할 건지도 상관없고, 네가 어쩌고 싶냐고.”

 

“지.”

 

“지?”

 

“집에 못 가.”

 

“아하.”

 

청명은 심드렁하니 턱을 괴었다.

 

“가면 되잖아.”

 

“쫓겨났다고!”

 

“그래? 그럼 집 근처에서 사고 세 개만 쳐 봐. 겸사겸사 이름도 좀 외쳐 주고, 집안 망신도 줘. 그럼 바로 집에서 찾으러 올 걸.”

 

“그건 잡으러 오는 거고!”

 

“그게 그거 아냐? 어쨌든 집엔 가잖아.”

 

앉으랬는데도 앉질 않네. 오히려 펄펄 뛰잖아? 청명은 참 요즘 애들이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요즘 애들이 다 이런 건 아닌가? 성격이 이상해서 나한테까지 굴러들어올 정도면 저 또래 중에서도 모난 애겠지?

 

“나도 안 쫓겨났는데 넌 뭘 했길래 쫓겨났냐?”

 

“아무것도 안 했어!”

 

아직 성장기를 다 지나지 않은 목소리가 빽 소리쳤다. 소녀 같기도, 소년 같기도 한 어린 소리다.

 

“그럼 게을러서 쫓겨난 거구만?”

 

“내, 내가 우리 항렬 중에 제일 열심히 수련했거든?!”

 

“역시.”

 

청명은 쭉 기지개폈다.

 

“그럼 가.”

 

“뭐?”

 

“가라고. 집에.”

 

“못 간다니까?”

 

“아니, 집에서 도저히 못 받아줄 놈 같으면 이런 데 보낼 게 아니라 죽였겠지. 어쨌든 명문거파에 시집 보낼 생각을 한 거 보면 죽일 마음은 없는 거잖아? 그럼 좀 나댄다고 안 죽어. 걱정 마. 일단 가서 비벼. 사람이 성의껏 비비다 보면 누울 자리도 생기고 그러는 거야.”

 

“제정신이 아니네....”

 

“넌 그럼 여태까진 내가 제정신으로 보였냐?”

 

“그건 아니, 큭, 풋.”

 

그 말이 웃겼는지 갑자기 아이는 웃기 시작했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울리니 참, 듣기는 좋은데 밤중이라 어울리지 않았다. 이 외진 오두막이 아니었으면 누가 듣고 귀신 들렸다 했겠군. 아이는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다가, 숨이 찬지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흐윽 하는 울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으, 아,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시키는 대로 잘 했는데....”

 

허리가 굽어지고 바닥에 이마가 닿는다. 서럽고 외로운 울음소리가 물처럼 흘렀다.

 

“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나쁜 짓 안 했어. 나 말 잘 듣고 수련도 매일 열심히 했어. 진짜 열심히 했단 말이야.”

 

“그래 보여. 독한 놈.”

 

“그런데 피가 나서....”

 

피? 어디 다친 놈으로는 안 보였는데. 청명이 갸웃하는 사이 아이는 윽, 윽 받치는 소리를 내며 분을 삼켰다.

 

“다리 사이에서 피가 나서, 무슨 검진을 해야 된다고 갑자기. 그러더니 내가, 내가 사내가 아니래.”

 

“음?”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젠 무학을 가르칠 수가 없대. 단전을 폐하지 않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라고.... 소, 소매. 내 소매.... 거기 내 거 다 정리해 놨는데. 장포를 뺐겼어. 아, 안 돌려준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배운 것처럼 조용히 살래. 어,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래.”

 

섦게 운다. 청명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지만 그럭저럭 받아들여졌다. 소매가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짓을 보면 무기고가 필요할 지경이니까. 길 가다 나뭇가지 하나 꺾어 휘둘러도 어지간한 진검보다 예리하게 쓸 수 있는 청명과, 하루종일 뭘 간다 달인다 갠다 온 난리를 쳐서 독 하나 만드는 녀석하고는 무기를 뺐긴 체감이 다를 테다.

 

“집 가서 돌려달라고 해.”

 

“못 해.... 안 줄 거야.”

 

“그럼 뺐아. 훔치든가.”

 

“진짜 죽을걸.”

 

“진짜 죽이려고 하면 다시 돌아와. 우리 사부는 너 있어서 좋은가보던데, 방 하나는 내주겠지. 그땐 쫓겨나는 게 아니고 네 발로 도망치는 거니까 기분이라도 좀 낫지 않겠냐.”

 

아이는 갑자기 뚝,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청명을 퍽 밀쳤다. 힘도 들어가지 않은 손이었으므로 청명은 받아주었다.

 

“그런 말 했다가 내가 진짜 여기 오면 어떡할 건데.”

 

“뭘 어떡해. 그건 네 맘이지.”

 

“너, 너도 내가 이상해서 싫지.”

 

“머리가 이상해 보이긴 하더라. 저 기분 나쁘다고 온 집을 비동처럼 만드는 꼴은 처음 봤으니까.”

 

“나, 애, 애도 못 가질 거래. 그러면 혈맹에도 못 쓰고 정말 쓸모가 없다고.”

 

“그건 내가 도사니까 상관없다만. 아니, 야. 그럼 못 쓸 걸로 정략혼을 걸었다고? 그 집 어른들은 양심이 없어?”

 

“나 못 쓸 거야?”

 

울먹울먹한 목소리가 가슴을 후볐다. 힘 하나 들어가지 않은 손, 그렇게 억세게 조각도를 쥐고 있던 손이 무엇도 쥘 수 없을 것처럼 풀려선 청명의 가슴팍을 툭툭 건드렸다.

 

“...아니. 사실 꽤 쓸만해.”

 

“그럼 왜, 왜 가라고 해.”

 

“너 집에 가고 싶잖아.”

 

“못 간다니까.”

 

“갈수 있다 없다가 아니라 네가 가고 싶잖아.”

 

“.......”

 

“그럼 가.”

 

청명의 품에 무언가 퍽 하고 뛰어들었다. 턱 아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닿았다. 훌쩍이는 소리가 품 안에서 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어딘지 애벌레가 기는 듯 간질간질하고 종이에 베인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나, 나는 뭐지.”

 

옷자락이 젖는다.

 

“나는 뭐지. 모르겠어. 내가 뭔지 모르겠어. 여태까지의 나와 지금의 나는, 나는 같은 사람인데 다르대. 그런데 뭐가 다른 거지. 내가 자수를 배워 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이제 비침을 던질 때가 됐다고 했었으면서. 이제 와서 내가 그때 여자 티를 낸 거래. 내, 내가 꽃꽃이는 보기만 해도 지루하다고 했던 건 다 까먹었나. 빌어먹을 영감들... 빌어먹을 아버지!”

 

멱살이 잡혔는데 반격하지 않은 건 아마 청명 생에 처음일 거다. 청명은 제 목깃을 틀어쥔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어색한 채 있었다.

 

“자수 두고 싶어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랬잖아. 누이들한테 몰래 배웠는데 잡아서 혼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그런 소리를 하는데? 걷지도 못하겠어. 옷이 너무 길어. 옷 입은 게 달라서 자꾸 숨이 턱턱 막혀. 소매가, 소매가 너무 짧잖아. 이러고 살아야 돼? 계속? 언제까지? 나, 나는. 나는....”

 

목소리가 훅 꺾였다.

 

“나는 왜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뭐가?”

 

“둘째 누이도 불편하다고 했었는데, 신경을 안 썼어. 덥고 추운 데서 수련하는 것도 불편하다, 그런 생각이나 했지.”

 

“그랬군. 어릴 때 일 아니냐?”

 

“응. 누이는 이제 바닥에 끌리는 치마도 잘 입고 다녀. 그럼 나도 그렇게 될까. 계속 이렇게 살면 싫지만은 않아지나?”

 

“모를 일이지.”

 

“안 나아지면 어떻게 해?”

 

“여기 오라니까. 여기선 여제자도 받아.”

 

“내 무학은?”

 

“그러게 일단 집에 가랬지.”

 

“누이들이 독공 탐낼 때 같이 배우고 싶다고 할 걸. 그랬으면 나 지금도 집에 있을까. 집에도 내 자리가....”

 

아이가 훌쩍이며 웃는다. 저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비웃음이었다.

 

“자리는 무슨. 뭘 배워야 할 지도,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이제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난. 이런 이상한 몸을 하고, 어디서 나를 받아주겠느냔 말이야....”

 

청명은 내가 받아주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벌떡 일어났다. 품에 들린 아이는 가벼웠다. 지난 보름간 매일 안아올렸던 무게였다. 잠에 취하지 않은 아이는 깜짝 놀라 옷자락을 붙들었다. 공중에 뜬 다리를 어찌할지 몰라 버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밤바람이 불었다.

 

“뭐야? 너 어디 가?”

 

“산에.”

 

“이 시간에?!”

 

“난 원래 이 시간에도 잘 다녀.”

 

숲은 원래도 어둡지만 밤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청명은 성큼성큼 잘도 걸어갔다. 바위를 한 손으로 짚어 넘으며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너 잘 잡아라. 여기선 너 혼자 못 돌아가, 어두워서.”

 

아이는 말은 없고 대신 팔을 뻗어 목을 감쌌다. 코끝으로 아스라이 좋은 향기가 났다. 이게 그 진정제 냄새든가? 이상하네,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데. 청명은 괜히, 생각한 것보다 더 멀리까지 걸었다. 어디까지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왔어?”

 

“어, 대강.”

 

하지만 청명은 멈춰섰다.

 

“여기 꽃이 폈어.”

 

“뭐? 겨울인데.”

 

“진짜야. 일찍 핀 거지.”

 

청명은 훌쩍 뛰어 가지 위에 섰다. 아이의 얼굴에 가까이 닿도록 몸을 숙였다.

 

“냄새 나지?”

 

“꽃은 향기라고 하는 거야.”

 

“아무튼.”

 

어둠 속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에 봄꽃이 피는 건 이상하냐?”

 

“.......”

 

청명은 훌쩍 뛰어내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 목표한 데보다 더 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여기도 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

 

“하루종일 산을 오가며 수련하는데 모르겠냐? 이거 만져 봐.”

 

“이거?”

 

“어허, 살살!”

 

“되게 유세떠네.”

 

온갖 재주를 부릴 만큼 섬세한 손은 어둠 속에서도 곱게 움직였다. 손끝이 꽃잎의 끝을 따라 둥글리듯 움직였다.

 

“...아.”

 

“이거 꽃잎이 여섯 장이야.”

 

“진짜네. 왜지?”

 

청명은 으스대며 말했다.

 

“그런 것도 있는 거지. 뭐가 꼬인 건지, 이 나무가 유독 여섯 잎 매화를 많이 피우거든. 어릴 때 한번 본 건데 어찌어찌 찾아지더라. 난 그새 말라 죽었을 줄.”

 

“수련한다며 무슨 나무를 찾고 다녀?”

 

“그건 너 때문- 흠.”

 

“응?”

 

어둠 속에서 갸웃갸웃하는 기색, 솔솔 풍기는 은은한 향기, 목덜미에 닿는 머리카락의 매끄러운 감촉이 좋았다. 하루 종일 악을 쓰다가 새벽이면 기절해 잠드는 것이 어쩐지 신경쓰여서, 꽃 가지라도 꺾어다 줄까 했다는 말은 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오며가며 벌써 꽃 피운 나무가 있는지 올려다보고 다녔다는 말도.

 

“네 잎짜리는 못 찾았는데, 그런 것도 있어. 가끔 가을에 피는 매화도 있어. 여름에 안 익는 매실도 있고, 그냥 다 있어.”

 

“응.”

 

어차피 청명은 말을 잘 못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냥 설명을 안 했다. 하고 싶은 말이나 대충 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게 아니고. 좀 다르긴 한데, 원래 나무가 이렇게 많으면 그런 나무도 있고.”

 

“응.”

 

“저어기 봉우리 넘어가면 제작년에 벼락 맞아서 쪼개졌는데 그대로 자라는 나무도 있어.”

 

“진짜?”

 

“죽은 줄 알았는데 일년쯤 있으니까 싹이 났거든.”

 

“보고 싶어.”

 

“좀 먼데?”

 

“만져보고 싶어.”

 

청명은 밤의 산길도 잘 걸었다. 달빛 하나 없는 밤에 오로지 기감에 의지해서 솔길을 디뎠다. 품 안의 무게가, 얇은 듯한 선과 바짝 곤두선 긴장이 좋았다. 내려놓기 싫어서 청명은 계속 걸었다. 평생 이 산을 헤매며 본 특이한 것은 죄다 읊었고, 녀석이 가자고 하는 데는 다 갔다. 보내기 전에 양껏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마른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푸르스름했다. 조금 더 있으면 해가 뜨겠구나.

 

“이제 집에 갈 거야?”

 

“나 집에 가면 엄청 싸워야 돼. 어른들이랑도 싸워야 된다고.”

 

“그게 뭐? 너 무인 아니냐?”

 

“무인이 싸움꾼인 줄 알아?”

 

“그럼 싸움꾼이 아니면 뭔데?”

 

“...그도 그렇다.”

 

청명은 다리에 힘을 주어 훌쩍 날았다. 조금 높은 곳으로 뛰니 하늘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아이를 내려놓았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을 바위 위에 나붓이, 긴 치맛자락이 늘어졌다.

 

“싸울 거지?”

 

“.......”

 

“갈 거지?”

 

“있잖아.”

 

“어.”

 

“이름이 뭐야?”

 

“야, 이거 없던 일로 해야 돼.”

 

“그렇지....”

 

싸울 거라면, 돌아갈 거라면, 집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 거라면 이 자리는 없었던 것으로 해야 한다. 어떻게든 무학을 다시 손에 넣을 거라면 시집 같은 걸 갔다는 기록을, 여아의 위치로 혼사를 논했던 흔적을 남겨선 안 되니까. 아이가 입술을 씹어 청명은 무심코 그것을 말렸다. 굳은살 박힌 엄지 아래에 입술이 닿으니 말랑했다. 화닥닥 손을 물리는데 아이가 불쑥 물었다.

 

“내 이름도 모르지?”

 

“몰라.”

 

청명은 아직도 화끈하게 느껴지는 엄지를 꾹 쥐어 숨겼다. 그리고 짐짓 어른스럽게 말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밤에 만나 어둠 속에서만 놀았지. 네가 더 크고 나면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거다. 그러니 우리는 만난 적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가. 너 여기에 묶일 운수가 아닌 것 같다.”

 

“...응.”

 

“그리고 또 만나면 재밌는 수를 보여줘. 너 재밌더라.”

 

“어떻게? 만나서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너나 나 정도 되면 언젠가는 다시 보겠지, 뭐. 검 잘 쓰는 놈이 있으면 나인가보다 해.”

 

“뭐 보여 줄까?”

 

“뭐든 재밌는 거.”

 

“그래.”

 

둘은 한동안 그러고 앉아있었다. 하늘이 점점 밝아져서,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때까지. 청명은 정말 그렇게 되기 전에 다시 아이를 안아들고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밤새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다며 자러 들어가 버렸다. 청명이 잠에서 깨었을 때, 아이는 더 이상 거기 없었다.

 

 

 

 

 

“형님은요, 자신감이 과한 면이 있다니까요?”

 

“없게 생겼냐? 살면서 져 본 적이 없어요, 내가.”

 

“으, 재수없어.”

 

당보는 다음 술잔을 찾아 술을 채웠다. 아까 건 둘이서 던지고 놀다가 깨먹었기 때문이다. 술에 절은 팔이 장포를 질질 끌며 술상을 엎었다. 청명은 그 꼴을 보고 낄낄 웃다가 뒤로 자빠졌다.

 

“도사 형님은요, 형님이 제 첫사랑인 줄 알죠?”

 

“그럼 아니냐?”

 

“아니거든요? 저에게도 이른 날의 순정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자식, 나한테는 내가 처음이래놓고!”

 

“아, 사귄 건 처음 맞는데.”

 

“그럼 뭐야. 어린애 장난질 수준 아니냐? 안 세도 되잖아.”

 

당보가 팔짱을 척 끼었다. 술에 젖은 소매가 앞섶을 적셨지만 그건 알 바 아니고.

 

“내 첫 마음을 준 사람은 있다 이거죠.”

 

“내 건데 남을 막 주면 어떡하냐.”

 

“아니, 내 마음이 왜 댁 거야. 너무 취하셨네, 이 형님?”

 

당보는 발개진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내게도 밤새도록 생 고생을 해서 꽃구경을 시켜주는 근사한 남자가 있었단 말이오. 시일은 많이 지났지만 첫사랑이라는 것이 참 오래 마음을 덥혀 주는-”

 

“상 등신 아니냐? 꽃 좀 보는데 무슨 고생을 해. 야, 고생씩이나 해야 꽃 꺾어 올 수 있는 놈은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어요. 너 그런 놈에게 꼬인 거냐?”

 

“아, 도사형님은 낭만이 없어!”

 

“낭만 찾아서 뭐 해. 뒀다 국 끓여먹게?”

 

당보는 혀를 쑥 내밀며 얼굴을 찡그렸고 청명은 또 낄낄 웃으며 손을 내밀어 그 코를 잡아 흔들었다. 서로 꼬집는데 금나수가 쓰이고 젓가락이 날 때마다 기묘한 무리가 번뜩였다. 무림의 노고수들이 술에 꼴아 못 볼 추태를 보여주는 진귀하고도 흔한 풍경이었다.

 

“그러는 형님은 정말 없어요? 아무도?”

 

“어어, 없었어. 없는 사람이야.”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어없는사라암.”

 

당보가 혀가 꼬이자 홱홱 고개를 저었다. 그런다고 취기가 떨어지나. 청명은 그 꼴도 귀여워서 자꾸 웃었다.

 

“으음. 없는 사람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죠?”

 

“이쁘게 생겼지, 뭐.”

 

“그럼 있는 사람이잖아.”

 

“없어, 없어.”

 

청명은 팔을 죽 뻗었다. 당보는 또 코를 잡힐까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덕분에 청명의 품에 그대로 푹 껴안겼다. 끌어안으니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화산귀환 청명당보 웹온리전 <고목발영>
2025년 12월 20일

 

© 2025 by 고목발영. Powered and secured by Wix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