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문 @lemoonpai24
망상
청명당보
천마의 목을 베어내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이는 장문사형도, 진이도, 화산도 아닌 너였다. 암향매화검이 향하는 끝에 녹색 장포가 펄럭이며, 청명의 두 눈이 일렁거린다.
-도사형님
간혹 생각한다. 천마도 마교도 전쟁도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가 늘어난 노인의 모습이었을까. 서로의 등에 기대며 술잔을 기울이는 남은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서로의 손을 잡고 삶의 끝을 조용히 보냈으려나.
만약 우리가 평범한 양민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마음 편히 도망이라도 쳤겠지. 남들 시선 속에 도망치며 오로지 우리 둘만 생각하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지금의 우리는 서로 짊어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런 욕심 많은 선택을 할 순 없었다.
끝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위한 선택지를 버렸다. 내 품에 차갑게 식어가는 당보를 끌어안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보야. 어찌하여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 우리에겐 이 평범한 나날들이 과분하였던 걸까?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바꾸고 싶다고. 우리에겐 의미가 없는 짓이겠지. 다시 돌아간다 한들 너와 난 똑같은 선택과 똑같은 행동을 취했을테니까.
땅에 곤두박질 치며 축 늘어진 청명은 숨을 힘겹게 내쉰다.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어 눈만 겨우 굴릴뿐이다. 청명의 눈이 옆을 향한다. 배에 검이 꽂힌 채 누워있는 ‘당보’가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의 눈이 크게 떠진다. 눈물인지 핏방울인지 눈가에 고여 주르륵 흘러내린다.
.....적어도. 죽는 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당보야.
*
“...정말이지. 이 놈 목숨 참으로 끈질기네.”
소소의 과한 붕대 처방을 받은 청명은 투덜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의약당을 탈출한 청명을 소소의 전두지휘하에 모두가 수색하는 중이지만, 뭐 소용없는 짓이다. 애초에 그럴 시간에 수련이나 더 할 것이지. 떼잉 쯧쯧.
“괜찮겠냐? 이번에 소소 그냥 안 넘어갈걸.”
“걔가 그러는 게 한두번인가.”
“나중에 대침에 죽어도 난 모른다.”
청명을 제일 먼저 찾은 건 조걸이었다. 끌고가긴 커녕 가져온 술병을 청명한테 건네며 옆에 앉았다. 찾았다 해도 이 화산광견을 무슨 수로 끌고 가. 내 대가리만 실컷 터지겠지. 나중에 소소 오면 조걸 사형도 나랑 같은 처지라고 청명이 웃으니 조걸은 끙 앓으며 에휴 될대로 되라 해라며 피식 웃는다.
“설마설마 했지만 진짜로 네가 천마 목을 베어낼줄은...”
“그럼 내가 하지 누가 해?”
“와 저 근본없는 자신감.”
“사형 덜 맞았지?”
“큼큼! 그거 알아? 너 천마 목 베어내고 ‘매화검존’ 별칭 생겼잖아.”
백천을 포함한 모두가 기절초풍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화산의 선조이며 존경 또 존경하는 매화검존님을 감히 저딴 망둥이한테 갖다붙이다니...! 나중에 청명의 주먹으로 모두가 죽... 아니 조용해졌다.
“그게 뭐 대수라고.”
“...혹시 머리가 마기에 물들기라도 했냐?”
“하?”
“아,아니야... 큼큼.”
“암튼 뭔일로 날 찾아온거야.”
진짜 날 잡으러 온 거면 진작에 소소 앞으로 내놓았을 걸 뻔히 안다. 조걸은 뒷목을 긁적이며 몇초를 망설였다. 평소 청명의 성질이었으면 휙 가버렸을텐데, 뇌물로 가져온 술 덕분인지 청명은 그 몇초를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그...”
“어”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
“...사형. 나 임자 있는 몸이야.”
“미쳤냐!! 당연히 넌 아니거든!!”
“그럼 윤종 사형?”
“거기서 왜 윤종 사형이 나와?!”
“헐 아니었어?”
“야!!!!”
후우... 숨을 고르며 애써 분을 가라앉힌 조걸은 화산쪽은 아니라고 답하였다. 청명의 눈이 동그래진다. 순간 조걸의 짧은 꽁지머리 끝에 보인 녹색의 끈을 보고 청명은 허 웃었다.
“상대가 작은 당이야?”
“뭐,뭣...?! 어떻게 알았냐...??”
“의외네. 엄청 티격태격해서 사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뭐... 처음엔 그랬지...”
조걸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어느 순간부터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고 자신은 물론 당잔 또한 서로의 마음을 인지하고 있다. 당잔과 함께하는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선택이 다시 온다 한들 내 대답은 똑같을테니까.
“다만... 사형제들이 어떻게 볼까 싶어서...”
사람으로서의 상식 그리고 자연의 순리로 여겨지는 남자와 여자.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반문을 가지지도 않으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자와 남자를 이상하다 생각하는 건 무리도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반응이다.
화산의 제자로 입문하여 지금까지 동고동락한 사형제들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까. 그게 좀 겁이 난다. 조걸은 턱을 괸 채, 딱히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당잔’이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뿐인데라며 중얼거리자 청명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걸 사형은 나를 닮았다고 줄곧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 년 전의 ‘청명’을 말이다. 닮아도 하필 이런 부분까지 닮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너무 웃는 거 아니냐.”
“사형 입에서 나올 소리들이 아니니까 더 웃겨.”
“이딴 녀석한테 상담을 청한 내가 바보지!”
“그래서 작은 당도 같은 의견인거야?”
“거긴 가족이잖아. 나보다 더하겠지.”
“후회해?”
청명의 물음에 조걸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겠냐?”
“사형이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때가 되면 말해야겠다며 조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 마신 빈병을 줍고는 청명한테 고민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고마우면 술 3병이라 답하니 조걸은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운 마음 다 없어지려 하네.
“슬슬 다른 데로 가야할거야. 이설사고가 네 위치 다 불어버렸거든.”
“미친...! 사형 알려줘서 고마워!”
“소소한테 잘 살아남아라~”
의미없겠지만 말이야.
얼마 안가 소소한테 이십대침을 맞은 청명은 의약당에 갇혀 소리를 질렀다. 의약당을 지나가는 것도 아닌데 화음까지 청명의 비명이 들려 당잔은 움찔 떨었다. 조걸은 오래 가겠다며 낄낄 웃으며 당잔과 맞잡은 손을 보란 듯이 꼬옥 잡았다.
*
나 참. 살다살다 얘네들 연애고민도 들어주는 날도 오네요. 장문사형. 아 그러고보니 그때 기억납니까? 사형. 내가 ‘남자 좋아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쭈니 그때 장문사형ㅡ
-...난 여자 좋아한다. 청명아.
-...사형. 머리를 어떻게 굴리면 그쪽으로 생각이 납니까?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좀 사고를 많이 친 놈이라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았어요? 네? 입에 침이나 바르라고요? 아이 사형! 이 사제가 거짓말 할 놈으로 보입니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놈이 자랑이라구요?
.....흠흠. 아무튼 장문사형께서는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저를 보시곤 이런 말을 하셨죠?
-후회하느냐?
청문의 물음에 청명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겠습니까?
-그럼 되었다.
...정말 장문사형한테는 못 당하겠습니다. 날을 꼬박 새우며 걱정에 걱정을 더한 나의 이 고민을 별것도 아닌 일상의 대화로 돌려버리셨잖아요. 그 날의 대화가 지나고 사형께선 저를 멀리하시지 않으며 언제나처럼 화산의 제자로 당신의 사제로 대해주셨지요.
그땐 장문사형이니 그렇게 나올수 있었던 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년이 지나 당신의 자리에 직접 서보니 쉽게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늦게 알았어요. 청문 사형. 생각을 길게 하셨던 이유는
‘내가 내뱉은 말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장문 사형.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그 날, 우리가 서로 나눈 마지막 대화가 그게 끝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만약 우리가 살아 돌아왔으면 저와 사형은 어떠한 대화를 나눴을까? 부등켜 안았을까. 엉엉 울었을까. 서로의 속내를 다 보였을까. 우리는 다시 서로 마주보며 웃는 사형제로 돌아갔을까?
“....나 참. 나답지도 않은 짓을...”
청명은 피식 웃는다.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노망이 왔나봅니다. 장문사형.
*
“사고는 이랬으면 어땠을까라고 상상해본 적 있어?”
소소의 부탁으로 청명을 감시중인 이설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적잖이 당황한 티를 냈다. 의약다에 하도 갇혀서 지루하다 못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걸까? 이설은 청명의 머리를 짚어 열이 있나 확인했다. 청명은 그 행동이 몹시 짜증났지만 괜히 건드렸다가 소소의 분노만 일으킬 뿐이니 애써 삭혔다. 이설의 손을 툭 치우며 있냐고 없냐고 물으니 이설은 턱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가끔... 화산의 제자인 아버지의 모습이 궁금했어.”
“흐음”
“아버지의 매화는 어땠을까...라고...”
이설의 눈이 그리움으로 젖어든다.
어쩌면 사숙과 사질로 지내왔을지 모르겠다.
“저는 당가 여인들이 비도를 배웠으면 어땠을까 상상했어요.”
“앗 깜짝이야! 언제 온거야?”
“청명 사형의 지루함 속에서 피어난 질문이 나왔을때부터요.”
당가 여식들도 무학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나는 거짓미소를 지을 필요도 없으며 머리만 무거운 치장들을 집어 던졌겠지. 그리고 밥먹는 시간, 자는 시간 줄여가며 하루종일 비도만 잡고 있었을거다.
“어쩌면 사고랑 라이벌로 만날 수 있었을지 모르고요.”
“...상상치고는 너무 자세한데.”
“당가에 있을 땐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며 그립다는 듯 웃는 소소. 결국 당가의 여식들도 비도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며 너무 늦은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다. 청명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당보조차 못 바꾼 당가다. 이 망할 당가는 세상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손톱만큼도 안 바뀔거라며 술에 잔뜩 취한 채 화를 냈었지. 뭐 기뻐해라 당보야. 털릴 대로 털린 이후에야 늦게라도 정신차린게 어디냐.
귓가에 맹도는 당보의 한숨이 청명을 실실 웃게 만든다.
*
-아평이를 볼때마다, 언젠가 나를 추월할 정도로 크겠지라며 생각을 합니다.
자기 몸집보다 큰 망치를 한 손으로 가볍게 잡으려나. 할아버님 할아버님 부르며 졸졸 쫓아다니는 그 작은 아이가 내가 더 이상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쑥쑥 자라겠지요.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으면 좋으련만...
-헛소리한다.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른 우리가 더 살고도 남지 깨꼬닥할 일은 없다.
-아 형님은 낭만이 없소.
만약의 일 아니오.
당보는 청명을 살짝 째려보며 에휴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괸다.
-도사형님의 말대로 우린 아평이가 늙을 때까지 살아있을겁니다. 그땐 청문진인과 청진진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테고요.
어릴땐 오래 살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칠십을 먹어가는 나이가 되니 막상 좋은 것도 아니구나 싶었어요.
-매일 보던 익숙한 얼굴이 하나 둘씩 없어져, 나 홀로 남게 될 날이 머지 않아 올겁니다.
-.............
-반로환동인 우리도 언젠가 죽게 될 날이 올테고요. 그땐 형님이 먼저 갈지, 내가 먼저 갈지... 아무래도 내가 먼저 갈 것 같소.
형님은 워낙~ 욕을 많이 쳐 잡수셔서 오래 사실 테니까요. 당보가 입을 가리며 키득 웃으니 청명은 덜 맞았지? 가볍게 주먹을 풀었다.
넉 달 후, 마교가 발호하였다.
*
거지 아이의 몸으로 깨어났을 때, 너도 다시 오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였다. 결국 나 같은 일은 두 번은 안 일어났다. 천마의 목을 베어내는 순간 마저도 나는 네가 비도를 날리며 달려오지 않을까. 너의 귀환을 기다렸어.
세상은 참 우리의 소원을 단 한번도 들어주지 않는구나.
신도 참 매정하지. 내가 큰 욕심을 바랜 것도 아니건만...
당보야.
만약 우리에게 다음 생이 있으면
유람을 가자.
우리가 마셔보지 못한 세상의 존재할 모든 술을 원 없이 마시며, 서로의 옆을 잠시라도 비우지 말자구나. 이번엔 생이 다하는 순간 서로의 옆을 지켜주며 손을 잡아 한날 한 시에 눈을 감자. 서로를 마음껏 사랑하는거다.
청명은 눈을 감는다.
몇 번이고 되뇌인 자신의 ‘망상’이 언젠가 이루어지길.
녹색 끈이 불어오는 바람에 천천히 흩날린다.
*
전각 위에서 술병을 빨고있는 청명은 밑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
“화음에서 왔습니다. 도사님.”
뭔가 싶어 고개를 살짝 내리니 한 여인과 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가 보였다. 여인 얼굴을 보니 저번에 갔던 객잔인가? 평소 같으면 바로 고개를 돌렸을 청명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유심히 쳐다보았다.
“현영 장로님을 불러ㅇ”
“아니요. 저희 아버님께서 화산의 잘생긴 제자를 찾아가라고 하셨어요.”
그치 당보야?
청명의 눈이 크게 떠진다.
엄마의 손을 잡고 활짝 웃는 ‘당보’
“아 혹시 백ㅊ”
“누구겠어. 나지.”
전각에서 휙 내려온 청명은 터벅터벅 걸어간다.
정신 나갔냐고 조걸이 내뱉으려다 청명 얼굴을 보고 도로 삼켰다. 자신이 당잔을 볼 때의 표정이다. 여인과 당보의 앞에 선 청명은 무릎을 꿇어 당보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렇지? 당보야.”
청명의 물음에 당보는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후기>
오랜만에 쓴 청당 연성인지라 소재를 무엇으로 잡아야 할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청당으로 쓰고 싶은 거 쓴 저는 이번에 ‘청명당보’를 제대로 쓰고 싶었습니다. 그 탓에 제출 기간을 몇 번이나 놓쳤는데 아량이 넓은 청당 주최자 무쿠의 배려로 전 무사히 청당 연성을 제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마워요. 무쿠 소저.
웹온리전에 올리진 않았지만 무쿠가 쓴 청당/고목생화도 재밌으니 다들 꼭 봐주세요!
ㄴ 무쿠 : 웹온리전 청당/미신도 꼭 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