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 @_USong_
심연의 끝에서
검존암존
달빛 아래의 잔
여느 때와 같이 둘이서 술을 한잔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 한 잔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병? 두 병? 기분 좋게 취해가고 있을 때면 청명의 시선은 항상 당보에게로 향해 있었다.
장포 소매를 살며시 잡는 손끝, 술잔에 대는 붉은 입술, 술을 마실 때 살며시 감는 눈.
그 모든 사소한 움직임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매화 향보다도 오래 머물렀다.
“도사 형님.”
“음?”
“왜 그렇게 봐요.”
당보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담담했지만, 끝자락에 묘하게 걸리는 웃음이 있었다. 청명은 그 웃음이 늘 마음을 흔들었다. 사람의 웃음이 이토록 조용한 파문을 남길 줄은 몰랐다.
“그냥 본다.”
“뭘요?”
“오늘은 네 얼굴이 좀 붉네. 술 때문인가, 달빛 때문인가.”
당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술잔에 비친 달빛이 잔의 표면을 따라 출렁였다. 그 빛이 그의 손끝에 닿았다. 청명은 그걸 보며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을 멈췄다.
이런 밤이면 늘 그랬다. 청명은 자신이 도사라는 사실을 잊는다. 도는 마음의 무심함에 있다지만, 당보를 보고 있으면 세속의 모든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의 미소 하나, 손끝의 떨림 하나가 천하의 진리를 가볍게 밀어냈다.
“형님은 늘 이상한 것 같소.”
“어째서.”
“사람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는 게 아닌 것 같아서 말이오..”
“그건… 네가 너무 들켜버리기 때문이야.”
“들켜요?”
“네가 웃을 때, 내가 무너지는 게.”
당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잔을 돌리며 술을 따라 올렸다. 청명은 그 잔을 받지도 않고, 그저 그가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술이 흐르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풀벌레의 울음. 모든 것이 그 밤엔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
“형님은...”
당보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 같은 곳을 보는 것 같소. 하늘이나, 산이나, 사람이나. 근데 난 자꾸 형님만 보고 있소.”
그 말은 마치 술기운에 묻혀 흘러나온 듯 조용했지만, 청명의 손이 멈췄다. 그는 당보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봤다. 붉어진 눈가, 희미하게 젖은 입술. 그 사이로 바람이 흘러들었다.
“…그건 좋은 버릇이 아니야.”
“그럼 나쁜 버릇으로 두겠소.”
“당보야.”
“예, 도사 형님.”
청명은 그 이름을 부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입 안에서 맴도는 두 글자가 이렇게 따뜻한 울림을 가질 줄 몰랐다.
“내가 너를 볼 때마다, 자꾸 인간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든다.”
“그게 나쁜 거요?”
“도는 멀어지지.”
“평소에도 도는 없었던 것 같은데.”
당보는 천천히 웃었다. 그 웃음은 산속의 물안개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청명은 고개를 숙여 잔을 들었다. 술을 마시려다 말고, 문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정인 사이인 줄 아는 모양이야.”
“그렇소?”
“그리 보인다고 하더군.”
“... ... 하긴, 형님이 이렇게 날 데리고 다니니까.”
당보는 천천히 잔을 돌렸다. 술이 반쯤 비친 표면에 달이 흔들렸다.
“그게 싫진 않은 것 같소.”
“뭐가?”
“사람들이 그렇게 본다는 게 말이오.”
“당보야.”
“예.”
“너무 멀리 가지 마라.”
“내가 멀리 가면... 형님이 잡으실 거요?”
“…모른다.”
그 대답은 언제나처럼 느릿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그 안엔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책임과 욕망, 이성의 경계와 붉은 감정의 틈.
당보는 잠시 청명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잔을 밀었다.
“그럼 형님, 마시죠. 오늘은 달이 예쁘잖소.”
“그래, 달이 예쁘지.”
청명은 잔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손끝이 아주 잠깐 스쳤다.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청명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이 짧은 순간 하나가 그 어떤 경문보다 강렬했다.
달빛이 흐르는 강가, 술 향이 퍼지는 정자, 그리고 그 안에 앉은 두 사람.
사람들은 그들을 연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이름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저 ‘도사 형님’과 ‘당보’. 그 말속에 모든 관계와 모든 금기가 녹아 있었다.
청명은 잔을 비우고는 말했다.
“네가 없으면 오늘 같은 밤이 너무 조용할 것 같아.”
“그럼 매일 오면 되죠.”
“그렇게 하면… 나는 네게서 못 벗어날 것 같다.”
“형님이 벗어나고 싶은 건가요?”
“모르겠어.”
당보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 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청명은 그 순간 조금만 더 취하고 싶었다.
봄바람이 드는 날
그날 술자리 이후로 며칠이 흘렀다. 청명은 평소처럼 산사에 머물며, 낮이며 밤이며 홀로 술을 마시며 지냈다. 가끔 장문 사형이 와서 묻는 것이나 잔소리를 하는 것에 답했다. 하지만 문득, 잔을 기울이던 밤의 장면이 떠올랐다. 술향, 달빛, 그리고 웃던 당보의 얼굴.
그럴 때면 괜히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을 다그쳤다.
“사소한 인연에 마음을 두는 건 미혹이다.”
그는 그렇게 되뇌었지만, 이상하게 미혹이란 단어가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오후, 산길에 봄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매화꽃이 흩날렸다. 청명은 산사 밖 작은 정원에서 매화나무 아래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사 형님, 또 꽃을 보고 있으시오?”
당보였다. 그는 가벼운 검은색 도복에 녹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조그만 차 병이 들려 있었다.
“언제 왔느냐.”
“아까요. 문 앞에서 불러도 안 들리던데요. 또 생각에 잠겼죠?”
청명은 대꾸하지 않고 검을 닦고 있었다. 당보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았다. 차 병을 열자 향긋한 향이 흘러나왔다.
“형님, 마시죠. 이번엔 술 말고 차예요.”
“차?”
“술만 마시면 또 형님 얼굴이 붉어지잖소.”
청명은 순간 멈칫했다. 얼굴이 붉어진 건 술 때문이 아니었는데, 그건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괜한 소리다.”
“괜한 건 맞아요. 근데 사실이잖소.”
당보는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랐다. 그의 손끝이 청명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청명은 잠시 손을 멈췄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보는 그 반응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청명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다만 청명이 그것을 ‘감정’이라 부르지 못할 뿐이라는 걸.
“형님은 참 이상한 것 같소.”
“또 무슨 말이냐.”
“저한테 자꾸 잘해주면서도, 잘해주는 줄은 모르는 게.”
청명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너에게 도리상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럼 그 도리가 다른 사람한테도 같아요?”
“…….”
“아니잖아요. 형님이 직접 차도 따라주고, 내 얘기 듣다가 웃어주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데.”
청명은 말이 막혔다. 말로 부정하면 너무 냉정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인정하면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당보는 그 모습을 보며 가볍게 어깨를 기대며 웃었다.
“형님, 이런 게 사귀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그런 사이 같은 거요.”
“나는 그런 것에 연루될 생각이 없다.”
당보는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청명을 바라봤다.
“근데 이미 연루됐는데요?”
“뭐라고?”
“나한테요.”
청명은 순간 가볍게 눈을 피했다. 차를 마시는 척했지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당보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매화꽃을 흩뿌렸다. 청명은 그 꽃잎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너는 형님 놀리니까 좋냐.”
“놀리는 것이 아니오. 그저 기다리는 것이지.”
“무엇을.”
“형님이 내 이름 부를 때 그 소리가 진심이 되는 순간을.”
청명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안에서 ‘당보’라는 이름이 맴돌았다. 그 이름은 늘 부드럽고, 때로는 위험했다.
“형님, 내가 좀 급하죠?”
“네 성정이 원래 그렇다.”
“그럼 천천히 할게요.”
청명은 시선을 들어 당보를 바라봤다. 햇빛이 그의 눈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청명은 마음속 어딘가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이제 돌아가라. 해가 기운다.”
“형님, 나 보고 싶었죠?”
“당보야.”
“네.”
“그 말, 이제 자주 하지 마라.”
“왜요?”
“너무 익숙해지면… 곤란하니까.”
당보는 잠시 청명의 눈을 바라보다가, 아주 잔잔히 웃었다.
“그럼 더 자주 해야겠소.”
청명은 돌아서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당보의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그 웃음이 바람을 타고 들려올 때마다 청명은 자신이 점점 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걸 막을 수가 없었다.
-전쟁의 끝
핏빛이 가신 들판엔 아직도 쇳내가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불탄 흙과 피비린내가 뒤섞여 올라왔다. 청명은 당보의 앞에 앉아 있었다. 옷자락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오른쪽 어깨에는 깊은 자상이 있었다. 그 옆에서 당보가 묵묵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붕대, 약포, 바늘, 그리고 오래 써서 손때 묻은 은빛 침통.
“움직이지 마시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명령도, 부탁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생을 붙잡는 의무처럼.
청명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자루를 쥐었던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을 보지 않은 척하는 사람이 당보였다. 그는 손끝으로 상처의 피를 닦아냈다. 손이 닿을 때마다 청명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고, 당보는 붕대를 감는 속도를 더디게 늦췄다.
“이제… 익숙해졌을 줄 알았소.”
청명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지친 사람만이 아는 냉소가 스며 있었다.
당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매듭을 묶고, 손끝으로 살짝 눌러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손끝이 멈췄다. 그 순간만큼은 의원도, 전우도 아닌 한 사람의 이름 모를 마음이었다.
청명이 그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는 언제나 그랬다. 말보다 조용한 손길이 더 많은 것을 전해주는 관계.
당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음 전장까지 이틀. 그 사이엔 다시 찢어지지 않게 조심하시오.”
그는 등을 돌렸고 청명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붕대 매듭은 단단했고, 그 안엔 피보다 더 짙은 무언가가 스며 있었다.
시선의 끝
바람이 멎자 들판은 기묘하게 고요했다. 검 끝에 맺힌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남았다.
청명은 손목을 들어, 막 감은 붕대를 바라봤다. 희미한 약초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는 언제나 그랬다. 전장을 지나면 꼭 그 향이 남았다. 그리고 그 향이 남는 자리에 언제나 당보가 있었다.
처음엔 몰랐다. 그의 손끝이 왜 그토록 조심스러운지, 그의 눈빛이 왜 언제나 자신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머무는지.
하지만 지금, 이 조용한 들판에서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붕대 매듭 위에 손가락이 닿자, 청명은 문득 웃었다.
“언제나 내 뒤에 있었구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바람이 그 말을 흩트리지 않았다.
그가 돌아서면, 그가 말을 걸면, 그가 피를 닦아줄 때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늘 당보가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그는 늘 그랬다.
청명은 검을 세워 들고, 먼 하늘을 보았다.
“그럼… 나는 언제부터 당보를 찾고 있었던 걸까.”
자문하듯 흘러나온 말.
바람 사이로 나뭇잎이 스쳤다. 그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숨결처럼 귓가를 스쳤다. 청명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가 전장을 함께한 이유는 단지 믿음이 아니라 그를 잃을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한 걸음의 거리
그날 이후로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당보를 자주 찾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약을 새로 지었는지 묻거나, 검의 균열이 나지 않았는지 확인받는다거나. 늘 그래왔듯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었다. 다만, 그의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달라졌을 뿐.
“도사 형님.”
당보가 부르는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잔잔했다. 청명은 문득 그 음성을 들으며 눈을 들었다.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당보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의 옷깃에 묻은 약초 가루가 반짝였다.
“응.”
짧게 대답했지만 청명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눈을 돌렸다.
이상했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요즘은 그가 고개를 숙이거나, 손끝이 닿을 듯 가까워질 때면 가슴이 괜히 불편하게 뛰었다.
“오늘은 검상도 깊지 않으니, 하루만 더 약을 바르면 괜찮을 겁니다.”
“그렇구나.”
청명은 대답하며 무심히 붕대를 고쳐 묶었다. 당보의 손이 잠시 그의 손등을 스쳤다. 그 짧은 순간, 청명은 이유도 모르게 손끝이 굳었다.
당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붕대를 다 감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익숙한 손길로 매듭을 정리하며 낮게 말했다
.
“형님은 늘 너무 서두르십니다.”
“그게 내 성정이지.”
청명은 웃었다. 그 웃음 끝에 자신도 느꼈다. 웃고 싶어서 웃은 게 아니라 그를 바라보고 싶어서 웃은 것이라는 걸.
잠시 후, 당보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자 청명이 불렀다.
“당보.”
“예.”
“오늘은… 잠시 쉬어가라. 날이 저물었다.”
“괜찮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청명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말없이 오래. 바람이 스쳤다. 그 바람 사이에 묻힌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 진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그래, 알겠다.”
청명은 짧게 답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무릎 위에서 가볍게 떨렸다.
그가 돌아선 뒤에도 청명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시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당보를 향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끝보다 먼저
밤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산골 전장에서 매캐한 연기 냄새가 피어올랐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청명은 숨을 고르며 검을 들었다. 등 뒤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당보, 뒤는 맡기마.”
“예, 형님.”
짧은 대답이었으나 그 음성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언제나 그랬다. 등 뒤에서 그가 있는 한 청명은 한 번도 두려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짧은 순간, 기척이 사라졌다.
“당보?”
청명의 시선이 흔들렸다. 바로 그때, 옆구리로 강한 바람이 스쳤다. 누군가의 검이 번뜩였고, 그 뒤편에서 피가 흩어졌다.
휘청거리는 그림자 하나. 당보였다. 그는 상대의 칼을 대신 맞아내며 청명 앞으로 쓰러졌다.
청명은 그 순간,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검이 아니라 손이, 손보다 먼저 목소리가 앞섰다.
“당보!”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당보의 옷자락이 찢기고, 피가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괜찮, …습니다, 치명상은 아닌 것 같소.”
그 말에 청명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앞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바로 검을 들고 적을 베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손은 검을 찾지 못했다. 오직 당보의 어깨만 붙잡고 있었다.
“이런 일로… 목숨을 걸지 마라.”
“나는 의원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게 제 일이지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핏방울이 번졌다. 그 미소가 청명에겐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
적들이 물러가고 고요가 찾아왔을 때 청명은 당보를 안은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의 시선이, 그의 숨결이 모두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이.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왜 자신이 이토록 흔들렸는지. 왜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건 단순한 의리도, 전우애도 아니었다. 그의 존재가 곁에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혀왔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스쳤다. 당보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청명은 손끝으로 그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조용히 말했다.
“다신… 내 앞에서 이런 짓 하지 마라.”
“예, 형님.”
“명심하겠다고 약조해라.”
“……예.”
그러나 그 말끝에 담긴 청명의 목소리는, 명령도, 꾸짖음도 아니었다. 그저 간절한 기도 같았다.
불꽃처럼 피는 밤
전쟁이 끝난 밤, 불빛이 꺼진 들판엔 연기만이 남아 있었다. 달빛이 흩어진 피 위로 비치고 멀리서 타들어 가는 깃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청명은 피 묻은 손으로 검을 꽉 쥐고 서 있었다. 그 옆에서 당보가 걸어왔다. 그의 발끝마다 젖은 흙이 튀었다.
“형님.”
짧은 부름에 청명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싸움의 열기로 뜨거웠지만, 그 안엔 다른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이오.”
“네가 다쳤다 했잖느냐.”
“피 몇 방울 흘린 게 뭐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명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한순간에 당보의 어깨를 붙잡았다. 피가 아직 식지 않은 손끝이 그의 장포를 적셨다. 청명은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했지!”
“형님…”
“너 하나 잃는 것이 전장 열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렵다.”
그 말은 분노 같았지만, 떨리는 목소리 안엔 두려움이 있었다. 당보는 그 품 안에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전장은 언제나 피를 흘리는 곳이오. 형님도 그걸…”
“모른다.”
청명이 말을 끊었다. 그가 당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는 네 피를 보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당보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조심스레 청명의 손등을 덮었다.
“형님, 나 괜찮…”
그 순간, 청명이 고개를 숙였다. 당보의 말을 막듯, 그의 입술이 닿았다. 짧고, 거칠고, 숨이 섞인 입맞춤이었다. 전장 끝, 죽음과 생 사이에서 터진 유일한 생의 고백.
청명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이마를 맞댔다.
“당보야.”
“...예.”
“이제 도도, 명분도, 다 필요 없다.”
“…….”
“너 하나면 된다.”
당보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 말을… 언제쯤 들을까 늘 생각했소.”
“그래서 기다린 거냐?”
“예. 형님이 무너질 때까지.”
그 말에 청명은 웃어 보였다. 그 웃음 속에는 지난 세월의 인내와 아픔, 그리고 놓지 못한 사랑이 모두 섞여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당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피와 먼지가 묻은 뺨 위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말거라.”
“예, 형님. ... 연모합니다.”
그 한마디에 청명의 심장이 무너졌다. 그는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에서 하나로 겹쳤다. 바람이 매화 향을 실어 왔다.
이제 그들은 서로에게 더 이상 도사와 의원이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세계였다.
심연의 끝으로
“... 당보야, 눈 좀 떠봐라.”
청명은 당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생기도, 희망도 없어보였다. 차가워진 피부가 따뜻한 손 끝에 닿는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 하고 떠나가는 이의 뺨을 만져봤다.
“ 당보야, … 당보야. ”
돌아오는 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품에 안긴 이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혹시라도 눈을 뜨고 품에 안겨오며 웃어줄 것 같았기에 그를 놓을 수 없었다. 놓고싶지 않았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날 다시 불러봐라 “
청명의 목소리는 갈라져있었다. 검을 휘두르며 갈라진 것도, 전장을 헤치며 터진 것도 아닌 오로지 잃어버린 이 하나 때문에 생긴 상처였다. 청명이 당보의 손등을 덮었다. 늘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던 손. 식은 채로 그의 손 안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장난스러우면서도 다정한 음성이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이 한 번 스쳤다. 당보의 흩어진 머리카락이 청명의 손등에 닿았다. 그 사소한 감촉마저 마음을 파헤쳤다. 청명은 당보의 이마에 이마를 기댔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와 다르게 차가웠다. 그는 당보의 어깨를 끌어안고 마치 체온이 돌아오길 바라는 듯 품을 꽉 조였다. 청명은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 또 한 번.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대신 그 절망을 꾹 눌러담은 얼굴로 당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 나 여기 있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내 곁에 있었다오.”
그 말은 청명만이 들을 수 있는 울음처럼 한참 동안 떨리며 전장을 맴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