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노 @abarr1er
우기
검존암존
청명은 검을 휘둘러 붉은 피를 털어냈다. 당보는 아직도 시체에 박힌 암기를 빼는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저와 당보뿐임을 확인한 청명은 먼저 가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털어올까, 고민하다가 발을 돌려 당보의 뒤에 붙어 섰다.
“거기서 뭐 해.”
자세히 보니 당보는 암기를 회수하는 게 아니라 작은 병을 쥐고 있었다. 발아래 있는 시체는 독 같은 걸 날려내던 놈이었는데 당보의 흥미를 끈 뭔가가 있던 모양이다. 손가락만 한 병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냄새를 맡는 당보는 귀여웠지만 청명은 빨리 털고 술이나 마시고 싶었다. 날이 습하고 우중충한 하늘을 보니 곧 우기가 찾아온다던 당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 탓이다.
“이것 보십쇼! 사파 주제에 이런 걸 숨겨놨다니까요.”
당보는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청명은 조그만 독 병이 뭐가 좋냐고 반박하려다가 이놈은 술에도 독을 타 먹는 독쟁이임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숨겨둔 비장의 수가 있었나 봅니다. 제 비도에 머리가 떨어져 나가지만 않았어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요.”
“아쉬운 것도 많다. 대충 정리하고 내려가자.”
“이게 냄새가 알듯 말듯 오묘하단 말이죠. 저놈이 이걸 쥐고 죽은 걸 보면 통한다는 확신도 있었을 테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저한테 통할까요?”
“너도 모르는 독이라고?”
“반은 압니다.”
“그게 모른다는 거지. 반반에 목숨 거는 미친 놈이 어디 있어.”
“절반은 안다니까요?”
병을 흔들어보던 당보는 고개를 들어 청명을 보았다. 방금까지 질색하던 얼굴이 눈이 마주치자 한결 풀어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려서 당보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목숨 건 적 없습니다. 형님이 있잖아요.”
당보는 단숨에 독을 들이켰다. 독의 영향인지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꽃을 통째로 먹은 것 같다, 목을 타고 꽃이 자라나는 느낌이다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픽 쓰러졌다.
청명은 당보가 또 야바위를 친다고 생각했다. 안색은 붉고 헤실헤실 웃는 게 독보다는 술에 취한 것에 더 가까워 보여서. 이상한 말로 자신을 흔들어 놓고 이렇게 쓰러져버리면 어떡하란 말이냐. 하지만 일각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 없이 누워있으니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하고 당보를 업어 산에서 내려갔다.
진짜로 술이 아니라 독을 먹은 게 맞나? 당보는 평소보다 따끈했고 무거웠으며 내쉬는 숨에서는 은은한 꽃 향이 났다. 전에 중독되었을 적에는 얼굴을 썩혀놓고 온갖 짜증을 내었는데 지금은 아예 딴판이다. 독이라고 다 같은 독이 아니다, 당보의 입에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지만 이렇게 몸으로 이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절한 당보를 들쳐업고 내려간 적은 있어도 이렇게 엉덩이를 바치고 업은 적은 처음이라서 묘한 기분도 들었다.
의약당에 당보를 떨궈두고 나와도 청명의 기분은 여전했다. 비가 내리니 당가에 머물 핑계가 생겼다고 좋아할 정도로 말이다. 독이 숨결로도 옮겨지던가. 온기가 사라진 등이 허전해 청명은 괜히 등을 쓸었다. 내내 웃고 있던 당보가 침상에 내려줄 때 한순간이지만 찌푸려서 그럴지도 모른다.
결국 청명은 당보가 깨어나는 것만 보고 가겠다는 핑계로 당가에 조금 더 머물렀다. 당보 없는 처소에서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안주 삼아 운치를 즐겨보지만 혼자 마시는 술은 맛이 없었다.
“도사 형님!”
당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얼굴은 붉고 옷도 막 자다 깬 사람처럼 흐트러진 채로. 청명은 빠르게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당보가 아직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괜찮냐?”
“네. 아무렇지 않습니다.”
실실 웃으며 당보는 청명의 옆에 앉아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당보가 언제 깨어날지 몰라 식탁에 잔은 하나만 놓여있었고, 당연하게도 이는 청명의 잔이었다. 청명은 당보가 잔을 채우는 동안 당보의 장포를 어깨 위로 올려주고 무복을 여며주었다. 비녀도 삐뚤해서 손을 데려다가 머리를 올려줘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만지지 않았다.
청명이 그러거나 말거나 당보는 잔을 가득 채워 제 입으로 가져갔다. 잔을 채우고 비우고, 또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니 금방 알딸딸해졌지만 자각하지 못했다.
“그만 마셔.”
“어라, 벌써 취하셨습니까?”
“내가 아니라 너 이상하다고.”
“제가요? 저 완전 멀쩡한데?”
당보는 뻔뻔하게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직 모자라다며 더 마시려는 걸 간신히 말리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형님이 다 마시려고 그러시냐며 찡찡거렸다. 어차피 주정뱅이와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마시지 못한 술들이 아쉽지만 중독되어서 이상해진 이놈부터 어떻게 해야 편해질 것이다.
“당보. 나 봐.”
“싫습니다. 형님이랑 말 안 할 거요.”
“나 보라고. 네 상태를 알아야 해독을 돕든지 의약당으로 보내버리든지 할 거 아니야.”
“괜찮으니까 왔죠. 해독도 잘 되었고, 술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면서 눈은 왜 피해.”
“그냥요. 제 마음입니다.”
정말 황당했다. 당보에게도 저 자신에게도. 중독된 주제에 술 처먹고 주정 부리는 당보에게 황당하고, 동시에 당보가 귀찮지 않다는 자신에 대해 황당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혼자만 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튀어나온 입술 하며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도 이따금 제 눈치를 본다는 점이 사랑스럽다. 요즘 들어 당보를 볼 때면 심장이 술렁거려 몸을 가만히 못 두겠던데, 중독은 저놈이 아니라 내가 당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보야, 우리 의약당 한 번만 다녀오자. 내가 아무리 봐도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형님은요? 같이 갑니까?”
“나는 너 보내고 돌아가야지.”
“밖에 비 오는데요. 밤에도 계속 내릴 겁니다.”
“비가 뭐 대수라고.”
“날도 어두운데…. 술상을 다시 내어오라 할까요?”
“그냥 둬. 의약당까지는 같이 가줄 테니까.”
청명의 회유에 당보는 순순히 따라가는 듯했으나 다시 불만스러운 티를 냈다. 나름의 타협책으로 의약당에 데려다준다고 했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심통을 부렸다. 청명은 됐다. 너 알아서 해라하는 마음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집이고 네 일이니 알아서 하겠지. 나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는 것이 청명의 주장이었다.
“어디 가요?”
청명이 문으로 걸어가자, 당보는 다급하게 일어나 청명을 붙잡았다. 양손으로 청명의 팔을 감싸 쥐고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화산.”
“의약당 데려다주신다면서요.”
“그랬는데 네가 안 간다며.”
“아니에요, 갈 겁니다. 갈 건데….”
청명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당보를 기다렸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않는다면 어떤 애교를 부려도 뿌리치고 가겠다 다짐하면서. 하지만 당보가 엉엉 울어버리면 달래주랴 떠나지 못할 걸 알았다. 가지 말라 애원하면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해달라는 대로 해줘 버리겠지. 이유는 모른다. 그냥 당보에게는 그러고 싶었다. 마음이 자꾸 그쪽으로 흐르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도사 형님 하며 엉겨 붙고 고운 얼굴로 웃는 걸 가만둬? 딴 놈들이 눈독을 들이기 전에 내 거라고 잡아둬야지.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됩니까…? 비가 그칠 때까지만요.”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는 말은 계속 같이 있어 달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우기라고 제 입으로 말해놓고서 바보 같기는.
“오늘만이다.”
청명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아니, 참았다고 생각했다. 당보의 눈에는 입이 귀에 걸릴락 말락 하는 꼴이 훤히 보였지만 청명은 몰랐다.
의약당에서 확인한 결과 당보는 독에 중독된 것이 아닌 사술에 걸렸다는 결론이 났다. 당보가 걸어가는 내내 청명의 팔을 놓지 않았고, 진찰받는 중에도 청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사실 청명이 의약당에 당보를 두고 간 후, 당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더니 울상을 지었고, 제 옆의 사람을 붙잡고 형님께서 언제 가셨냐며 묻다가 못 들은 거로 하라며 말을 돌렸다.
다행히 의약당에는 청명의 행방을 아는 이가 있었다. 장로님의 처소로 가시는 모습을 보았다고 듣자마자 장포를 챙겨 바람처럼 사라지셨고, 청명을 따라 졸졸 제 발로 돌아오셨다고 모 당가인은 증언했다.
당보가 사라진 동안 의원들은 독을 조사했다. 운 좋게도 독 병에는 소량의 독이 남아있었다. 성분을 조사하니 수면제와 환각을 야기하는 독초가 주로 쓰였고, 이는 당가인이라면 내성을 가지는 흔한 종류임이 밝혀졌다. 설사 중독되었다 하더라도 오래 지속되는 종류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의원들은 당보의 행동이 독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으리라 추정했다. 둘이 정리한 사파가 건물 내부에 사람들을 가둬두고 있었고, 그들이 하나같이 제각각의 말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술에 힘이 쏠렸다. 무엇보다 어떤 해독제도 당보를 돌려놓지 못했으니 당장은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음 날 저녁, 청명은 당가주에게 2가지를 부탁받았다. 하나는 당가에 머무르면서 당보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 것, 다른 하나는 당보가 처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어딜 가던 저와 붙어 있으려는 당보 덕에 전자는 쉬웠으나, 후자는 청명으로서도 난감했다.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것도 일인데, 주변에 영향도 주지 말라고 하니. 그럴 거면 수면 독으로 재워두지? 하고 비꼬았다가 사술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독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영영 풀리지 않으면 없는 사람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얼굴이 어두우십니다. 사람 하나 죽이시겠소.”
당가주와 대화를 끝내고 나오니 지우산을 쓴 당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청명은 다른 사람 구하라는 대답을 던지고 나오는 길이었다. 시끄러운 제 속도 모르고 실실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당보는 청명을 향해 지우산을 기울였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기분이 안 좋은 마당에 몸도 찝찝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제대로 씌우기 전에 청명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기다리라는 말도, 멈추라는 말도 듣지 않고 자꾸만 멀어져갔다.
“도사 형님!”
초조한 마음으로 연신 청명을 불러보았지만, 청명이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물웅덩이를 밟았는지 발이 축축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우산은 어디선가에서 놓아주었다. 점점 거세지는 비에 눈이 따가웠다.
오늘만이다.
당보의 희망은 청명의 말이었다. 비가 내리면 같이 있어 주겠다는 약속. 오늘은 시간이 흘러 어제가 되어버렸지만, 아직 비가 내리니 형님이 곁에 있어 주시라 믿었다. 약속했잖아요. 계속 내 옆에 있어 주겠다고 그랬잖아요.
“제발요, 형님. 멈춰보십쇼.”
머릿속에서는 부끄러워하는 청명이 선명했다. 반대로 현실은 싸늘한 뒷모습만이 당보를 기다렸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끊임없이 피어올라서 몸이 통제되지 않는다.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의식이 차츰 옅어져가고, 우두커니 멈춰 선 당보는 비에 젖고 있었다.
“가지 마세요….”
작은 목소리는 순식간에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하얀 도복 자락조차 어둠 속에 사라져 당보에게 남아있던 작은 기운까지 전부 앗아갔다. 떨어진 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당보에게 남은 것은 오직 캄캄한 절망뿐이었다.
차가운 빗물이 제 열기를 식혀주길 바라며 청명은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이대로 객청으로 돌아갔다간 갈 곳 잃은 분노를 당보에게 쏟아버릴 것 같았다. 사술에 걸린 너는 어떤 말을 뱉어도 한결같은 얼굴로 날 보고 있을 테니까. 당가 욕을 해도, 네 욕을 해도 웃고 있겠지. 그런 사술에 걸렸으니까.
당보를 데리고 화산에 갈 수는 없다. 사술이 풀릴지 확신도 없는데 계속 옆에 있을 수도 없었다. 당보의 상태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 당가주의 대처가 최선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씨발. 나보고 어떡하라고.”
무력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웠다. 왜 너는 독을 처먹어서 일이 꼬이게 만드냐. 기절했으면 얌전히 잘 것이지 나는 왜 붙잡아.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길래 날 믿냐고. 대상 없는 말들이 비와 함께 툭툭 떨어졌다. 쫓아오던 발소리는 어느새 멎어있었다. 청명은 아무도 없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발을 옮겼다. 자신에게는 당보를 붙잡을 자격도, 당보에게 붙잡힐 자격도 없었다. 청명은 당보를 버렸고, 이제 화산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이 모든 일과 작별이었다.
마음을 먹으니, 대문까지는 금방이었다. 갈 거면 빨리 떠나라는 듯 늦은 시간임에도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청명은 화산에 가기 전에 몸부터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걸을 때마다 축축한 도복이 달라붙어 불편했기 때문이다. 물 한 방울 닿지 않고 올 수 있는 놈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니 분명히 한 소리 하시겠지. 이럴 거면 당보가 주는 지우산이라도 받을 걸 그랬나. 씁쓸한 아쉬움이 남았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 더욱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보자,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눈에 담겼다. 당보의 말이 머릿속에서 웅웅거린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 곁에 있어 달라고.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내리니 제 팔을 붙잡고 가지 말라는 듯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당보가 있었다. 눈 깜박하면 사라지는 환영에 발이 얼어붙었다. 비를 뚫고 애써 쌓아 올린 결심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청명은 뽀송해진 몸으로 침상에 걸터앉았다. 널찍한 침상 대부분은 이미 누가 선점해 버려서 가장자리에나 겨우 궁둥이를 붙일 수 있었다.
“자냐.”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보는 단단히 삐졌는지 등을 돌리고 꿋꿋하게 자는 척을 한다. 무슨 말을 해도 반응 없이 묵묵부답인 것보다 낫다만, 대화가 되지 않는 건 똑같았다. 억지로 몸을 돌려 얼굴을 마주할까 싶다가도 부어있는 눈을 보면 그럴 마음도 사라져 한숨만 나왔다.
청명이 당보를 찾았을 때, 당보는 물귀신 같은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 깜짝 놀라 기절할지도 모를 모습으로 울고 있어, 하마터면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길래 우선 욕탕에 집어넣었고, 머리를 말려주고 나자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침상에 누워버린 것이 지금의 상태.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들어서 제가 직접 한겹 한겹 옷을 벗겨주기까지 했다. 욕조에 넣어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질 않나. 침의를 찾으러 갔다 온 거다 해명해도 듣지 않고 저만 뚫어져라 쳐다보질 않나. 청명으로선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나도 씻어야 하니 나가 있으라 말해도 못 들은 척 버텼으니 말 다했지. 결국 청명은 당보의 시선을 견디며 씻어야 했다. 오로지 상대가 존재하는가만 확인하는 집착적인 시선이었다.
“계속 자는 척하면 나 간다.”
장난스레 말을 붙여도 당보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움찔거리지만, 다행히 피하지는 않는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쳐 지날 때마다 나는 향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청명은 절대 이곳에서 잠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늘 당보에게서 맡을 수 있던 향이 제 몸에서도 똑같이 나는 탓에 얼굴이 뜨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제는 말을 걸어도 무시하네.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제가 누굴 무시했다고 그러십니까. 무시는 아까 형님이 하신 게 무시죠.”
당보가 중얼거렸다. 낮과는 상반된 모습이지만, 청명은 우울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기로 했다. 세상 무너진 사람처럼 우는 아까에 비하면 성가시긴 해도 지금이 좋았다.
“내가 언제 널 무시했어.”
“양심도 없고 사람 마음도 모르는 형님은 평생 그렇게 사십쇼.”
“이 새끼가.”
청명이 주먹을 들자, 당보는 몸을 돌려 서운함이 담긴 눈빛으로 청명을 올려보았다.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부르는데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가신 게 도사 형님이십니다. 계속 있어 주겠다 하셔놓고 말 한마디 없이 당가를 떠날 생각이었잖아요.”
“안 갔잖아.”
“갈 생각이었죠.”
“그러면 지금 네 앞에 없었지. 널 데리러 안 갔겠지.”
당보는 곰곰히 생각했다. 형님이 가버리신 것은 사실이지만 되돌아온 것 역시 사실이다. 단순히 비 맞는 게 신경 쓰였다기에는 씻겨주시기도 했고, 지금은 자신을 달래주고 있다. 그 청명이 말이다.
“가주 때문입니까?”
“비슷해.”
“그럼, 저 때문이군요. 뭐랍니까. 저랑 다니지 말래요?”
“아니, 너 데리고 화산 가서 살림 차리래. 제발 평생 데리고 살아달라던데.”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던진 농이었다.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내뱉었지만, 막상 뱉고 나니 부끄러운 말이라 괜히 허공을 보았다. 이런 모습이 더욱 진심처럼 보인다 해도 당장은 당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저는…. 정 상대가 없다면야. 그것도, 괜찮은데요.”
침묵에 숨이 막혀갈 때쯤 당보가 대답했다. 대답이, 그것도 긍정으로 돌아올 줄 몰랐던 청명은 빠르게 당보를 돌아봤다. 자신이 착각해서 당보의 말을 곡해한 건 아닌지 확신이 필요했다.
“저나 형님이나 만나는 사람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까 문제 되는 점도 없잖아요. 말년을 혼자 보내면 또 적적하기도 하고…. 지금처럼 비무하고 술도 마시면서 사는 거면, 저는 꽤 좋다고 보긴 합니다. 물론 형님도 괜찮으시면요….”
말을 마친 당보는 피곤해졌다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그러더니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청명이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는 비가 내리니 이곳에서 자고 가도 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절대 한 침상에서 잠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거절하면 당보가 속상해할지도 모른다는 합리화를 하며 조심스레 당보의 옆에 누웠다. 방금까지 누워있던 당보의 온기가 잠기운을 싹 달아나게 만들어서 청명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무겁다.”
“버티십시오.”
“더워.”
“원래 여름은 그런 법입니다.”
청명은 평상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몸은 움직일 수 없고, 하얀 하늘 외에 달리 눈을 둘만한 곳도 없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갈색 머리가 있지만, 이쪽은 건드리면 무는 개와 다름없었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거냐.”
“네.”
“나 씻지도 못했어. 땀 냄새도 날걸.”
“괜찮아요. 아무 냄새 안 납니다.”
“찝찝한데.”
“그럼 씻겨드릴까요? 형님은 몸만 오시고 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됐다. 그냥 있자.”
청명은 신이 나서 몸을 일으키는 당보의 머리를 감싸 도로 원위치시켰다. 제 가슴에 볼살이 눌린 것도 모르고 실실 웃는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몸을 움직여 편한 자리를 찾아 늘어지니, 졸지에 침상 취급이었으나 기분은 꽤 괜찮았다.
오늘은 청명이 당가에 머문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당가에서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수련하고 점심을 먹고 술 마시고 저녁 먹고 술 마시는. 그야말로 끝내주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는 늘 당보가 함께했으며 수련할 때를 제외하면 신체 부위 어디 하나가 닿아있었다. 대개는 손이었고, 가끔은 가슴이었으며, 어제부터는 다른 부위도 조금씩 위협받는 중이다.
좋냐 싫냐를 따져보자면 당연히 좋다고 대답할 것이나 청명에게는 사술에 걸린 당보를 이용한다는 자각이 있었다. 어떤 사술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 마음을 강요하기엔 도사로서의 양심이 아프달까. 제가 없으면 눈에 띄게 우울해했다가, 제 옆에서는 그나마 활기를 찾으니, 치료를 위해서라도 당가에 머무르는 것이 옳았다. 한 차례 거절했던 가주의 부탁을 승낙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고.
하지만 청명은 가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정인도 아니고 무력으로 당보를 제압할 수 있으며 당보에게 홀리지 않을 과거의 청명이라면 몰라도, 당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 실수인 척 손을 대는 청명에게 할 부탁은 아니라는 소리다.
“저 많이 무겁습니까? 내려올까요?”
나른한 정적 속에 당보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청명은 괜찮다는 뜻으로 머리를 두어 번 토닥여주었지만, 당보는 상체를 반쯤 들어 청명의 기색을 살폈다.
“힘들어 보여?”
“그건 아닌데 형님 심장이 빨리 뛰어서요. 제가 위에서 누르니까 혹시 숨이 안 쉬어지시나 하고.”
당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 잘못으로 형님이 잘못되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얼굴로 청명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 상태를 살폈다.
청명으로서는 어이없기만 한 소리였는데, 감았다 뜰 때마다 흔들리는 속눈썹이라던가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자꾸 눈이 가서 조용히 있었다. 얼굴은 가까워지고, 몸은 움직일 수 없으니, 누가 보면 당보가 덮치는 중이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광경이기도 했다. 내심 우리가 그런 사이라고 소문났으면 하는 마음이 있던 청명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난 원래 이랬다.”
“거짓말하지 마십쇼. 아까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수련이 끝났으면 진정되어야지, 다시 빨라지면 안 된다고요.”
“기분 탓이겠지.”
당보는 가슴에 올라와 있던 손을 목으로 옮겼다. 턱 아래에서부터 선을 타고 올라가는 하얀 손가락은 청명의 뺨을 감싸고, 이마를 살살 쓸어내린다. 정상 체온인 제 손보다도 뜨거운 얼굴에, 예전에 먹였던 독이 이제야 효과가 도나 싶을 정도로 청명의 상태는 이상했다.
“봐요. 점점 빨라지잖아, 요….”
눈이 마주쳤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데일 것 같은 뜨거운 눈빛으로 제가 하는 양을 봐주는 청명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점점 붉어지는 얼굴도 그렇고, 기대하는 눈빛도 그렇고. 그럴 리 없다고 여겨 지웠으나 청명을 보고 있으면 원인은 정말 저 때문인 것 같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심장이 설렌다. 머리에 열이 올라 생각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온통 형님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확인하고 싶기만 하다. 어떡하지. 톡 건들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들이 터져버릴 것 같다. 형님이 너무너무 좋다고. 하루 종일 형님 생각만 하고 있다고.
“너 얼굴이 너무 빨갛,”
“좋아해요! 아니, 형님은 저를, 그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그러니까 형님도 저를 좋아하시는지, 묻는 겁니다….”
이게 아닌데. 당보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도저히 청명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형편없는 고백을 뱉는 자신이 끔찍해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못 들은 거로 해주십쇼. 저 지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뭘 잊어줄까. 네 고백? 아니면 내 고백?”
“네? 그게 무슨….”
당보를 지켜보던 청명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자락 쥐어 그 끝에 입을 맞췄다. 맞닿은 심장이 똑같은 속도로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